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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적 Oct 01. 2024

손끝으로 만지는 계절

만져야 읽힐 수 있어.

아마도 그 버릇이 생겨난 건 친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늘 호들갑스럽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말 꼬리 잡는 것도 그리고 집에 한시도 붙어있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아이.

나와 다르게 친구는 있는 듯 없는 듯 교실에 있다가 방과 후엔 집으로 가서 좀처럼 나오질 않았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를 따라 친구 집에 갔었는데 친구의 책상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아주 큰 책상이었고 친구가 그곳에 앉아서 하고 있었던 것은 무척 흥미로워 보였습니다.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에 못 같은 도구로 가만히 누르고 다음 글자를 다시 그렇게 오래된 습관처럼 친구의 손은 눈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작은 테이프를 채워갔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다 마른침을 삼키며  딱 한 번만 해보고 싶다고 애원했습니다. 제 얼굴은 비교적 불쌍해 보일 때 유용하게 사용되곤 하는데 친구가 자리를 비켜주고 저는 고작 제 이름을 써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친구에겐 앞을 볼 수 없는 엄마와 누나가 있었는데 친구의 책장엔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친구가 너무 자랑스러워 보였습니다. 행복해 보였고 언제가 점자를 잘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친구 검지와 중지에 박혀있던 굳은살도 매우 부러웠습니다. 가끔은 엄마에게 글씨들을 보여주며 잘 보이는지 묻기도 하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옷을 걸쳐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가 숫자옆의 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숫자가 손끝으로 말을 겁니다. 그때의 버릇으로 그때의 동경으로 가끔 점자를 써봅니다.

오늘 하늘은 폐관을 앞둔 실내 식물원처럼 먼지 뒤덮인 유리 지붕 아래로 빗방울이 흐르다 멈춘 자국으로 가득합니다.


● ●   ○ ●   

● ○   ● ○   

○ ●   ● ●


가을입니다.

만지면 가을이라고 읽힙니다. 하지만 가을이라고 읽힐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손끝으로 만질 수 없는 건, 가을이라고 읽히지 않습니다.

눈으로 읽는 사람들은 가을인 줄도 모릅니다.


그런 아침이었습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만지는 사람은 볼 수 없는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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