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시 눈을 뜹니다. 고양이가 천천히 발바닥을 내딛는 것처럼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해열제를 먹은 아이가 아직 남아있는 미열을 감지하듯이 한결 무거워진 몸으로 오늘이 얼마나 뜨거운지 이미 알려주는 새벽입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은 양서류의 살갗처럼 서늘하기도 합니다
지상의 모든 현관문을 열면 다른 세상의 찜질방 수면방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문을 열면 끈적이는 열기 속으로 찜질방 특유의 냄새가 나고 사람들은 잠들어있어요.
이런 열기 속에서 잠들 수 있는 건 기적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그토록 피곤했을 일상을 내던지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죠. 안쓰러움같이 뜬금없는 감정과 함께 말이죠.
가을 쪽으로 기울어졌던 추가 다시 여름 끝으로 향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렇게 더운 날이 계속되다가 가을은 대형쇼핑센터 지하의 식료품관 시식 코너에 딱 한 번 콕 찍어 먹고 나면 가을이라는 이름의 시식 코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손에 들고 있던 일회용 이쑤시개는 늘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라 들고 다닐지도 모르죠.
언젠가 가을이라는 계절이 이 땅에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말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계절을 떠올려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을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해줘야 할지 며칠 사이 생각해 보곤 했어요.
가을이라는 계절은 봄과는 달라요. 봄이 점점 기온이 오르며 민들레가 홑씨를 날리고 여기저기 봄축제가 열린단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밤새 통화를 하고 처음으로 산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세상은 좀 더 분홍스러워진단다.
마음은 자꾸만 살랑거려져 작은 일에도 설레어졌지. 모든 사랑의 날들은 그 봄에 다 있었단다.
가을은…. 가을은…. 가을은 너무 오래전 일인 데다 너무나 짧은 날들로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마지막 가을 날도 기억하기가 힘들어
가을엔 작은할아버지 댁에 갔었어요. 나만 그런 걸까요 할아버지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더 살갑고 다정히 대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가을이 오면 작은할아버지를 뵈러 갔어요.
마당에는 등나무에서 작은 손바닥 같은 잎들이 그늘을 만들고 간혹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잎들을 커다란 싸리 빗자루로 쓸어내시다 지나는 제 머리를 한동안 쓰다듬어 주곤 하셨어요. 작은할아버지 손길은 가을 햇살 같았죠.
나는 참지 못하고 할아버지 곁을 맴돌다 모란이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제 손바닥에 머리를 들이밀 듯이 할아버지 손 안을 파고들곤 했었죠.
아직 사용 가능한 가을을 뭐라고 얘기해 줄 수 있을까요?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계절에 대한 말이죠.
사진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