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비슷하게 뒤섞여있다가
산기슭이 봄빛으로 번져갈 무렵이면, 벚꽃이 무리 지어 피어난다.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흐드러지기 시작한 그 연분홍 물결은, 낮 햇볕 아래선 흰빛에 가까워지고, 저녁노을을 닮은 시간엔 물 먹은 종이처럼 붉게 번진다. 바람이 불기만 해도 꽃비가 날리고, 그 아래 서 고개 들어 잠시 말을 잊는다. 흩날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봄'이라는 단어로 저장된다.
그 한가운데, 사람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가장자리. 벚나무 무리의 외곽에, 한 그루의 살구나무가 있다. 단정하고 낮으며, 가지는 바람에 움츠린 듯 안으로 둥글게 말려 있다. 목련처럼 당당하지도 않고, 개나리처럼 명랑하지도 않다. 살구꽃은 희고 붉은빛이 살짝 물든 꽃잎을 단출하게 피운다. 열 개의 꽃잎이 있으면 그중 세 송이는 벌써 진 듯 구겨져 있고, 나머지는 피어 있으면서도 머뭇거린다. 흐드러짐보다는 머무름, 찬란함보다는 침묵 쪽에 가까운 개화.
그 나무를 알게 된 이후, 매년 벚꽃보다 며칠 먼저 그 자리를 찾는다. 살구꽃은 빠르게 피고, 빠르게 진다. 찬 공기를 감수하며 피어난 그 작은 꽃들은, 사람들이 벚꽃을 보기 시작할 무렵이면 이미 지고 있을 때가 많다. 나무 아래에는 꽃잎보다 먼저 떨어진 갈색 수술들이 마른 빗자루처럼 땅을 덮고 있다. 마치 스스로의 흔적을 쓸어 담듯이.
꽃이 거의 다 진 살구나무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잎들이 마치 공연의 클라이맥스를 연출하고 있는 듯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그 가지에 머물렀다. 불그레한 가지 끝에 남은 두세 송이의 꽃. 꽃잎에는 엷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흰색 속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옅은 자줏빛 실핏줄이 스며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단아한 미묘함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건 고요한 파도였다. 소리 없는 고백처럼, 혹은 오래된 편지 속 글씨처럼.
그 순간 벚꽃처럼 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피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군락으로 피어나는 삶보다는,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지는 삶에 더 가까웠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간을 느끼며 피고 지는 방식. 그 살구나무는 거울 같았다.
벚나무 아래엔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다. 벚꽃은 프레임 속에서 완성된다.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며, 박수받는 풍경이 된다. 그에 비해 살구나무는 프레임 바깥에 있다. 애초에 찍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외곽성, 그 주변성 속에서만 느껴지는 깊이가 있다. '조용히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일지 모른다.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계절을 놓치지 않는 일.
살구꽃이 진 자리엔, 조그맣고 단단한 열매가 매달린다. 처음엔 초록빛이고, 시간이 지나며 점점 누렇게 익어간다. 겉은 매끈하지만, 안에는 단단한 씨가 박혀 있다. 꽃이 주목받는 동안, 그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은 꽃이 아니라 그 열매에 담겨 있다. 순간의 아름다움보다,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키워내는지가 더 중요하다. 살구나무의 시간표를 보며, 살아간다는 것의 구조를 다시 배운다. 피고 지는 것, 그리고 맺는 것.
봄이 끝나갈 무렵, 살구나무 아래엔 작고 단단한 그림자가 진다. 햇빛에 드러나지 않는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그 나무는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군락 속의 독립. 피어 있는 동안만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고 나서도 의미를 품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
벚나무 군락지에 살구나무 한 그루. 누가 심었는지는 모른다. 일부러 거기에 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인지. 하지만 그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선택받지 않은 자리라 해도.
그 나무 앞에 서면, 봄이라는 계절도, 생이라는 시간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환하고 화려한 것들 너머에서, 작고 조용한 것들이 보내는 신호를 이제 읽을 수 있다. ‘피었는가?’가 아니라,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살구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늘 묻는다.
그 아래..... 오래 서성이고 있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