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권태라는 도화선을 따라 폭발한다
밤이 완전히 식어버린 방 안에는 미세한 공기의 파편이 남아 있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먼지 입자가 서늘한 전등빛 아래에서 느리게 회전했다.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의 입자 같았다.
즐거움은 언제나 그런 무표정한 정적 속에서 시작된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듯한 냄새가 피어오를 때, 권태인지, 즐거움의 예고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폭발은 그 경계가 모호한 곳에서 일어난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권태를 견뎌냈는지 모른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창밖의 어둠이 얼마나 짙어졌는지를 무심히 바라보며, 의미 없는 미소를 흘린다. 즐거움은 이런 무의미 속에서 서서히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구조는 마치 오래된 시계의 톱니처럼, 무심히 돌고 있으나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태는 즐거움의 불안한 전제다.
어떤 사람은 권태를 병처럼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치로 여긴다. 그러나 권태는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점검하는 가장 정직한 상태다. 아무 자극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욕망의 껍질이 벗겨진 채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때의 고요함 속에서 즐거움은 첫 불꽃을 얻는다. 즐거움은 결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권태의 심연에서 솟아오른다.
도시의 저녁, 한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의 손끝이 유리잔을 천천히 문지른다. 손끝의 마찰음이 미세하게 공기를 진동시킨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무의미한 순간 속에서, 아주 작은 파열음이 생긴다. 유리잔의 울림이 그의 내면에 스며들며 오래된 감정 하나를 깨운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작은 즐거움이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가벼워지는 감정. 그 순간 그는 모르게 웃는다. 그리고 곧 그 웃음이 사라진다.
즐거움은 언제나 권태를 불러일으키고, 권태는 다시 즐거움을 잉태한다. 그 순환은 인간의 내면에서 폭약처럼 이어진다. 어쩌면 즐거움은 권태의 반대가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 있다. 권태가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즐거움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불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마른 심지가 필요하듯, 인간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권태가 도화선이라면, 즐거움은 그 끝에서 일어나는 폭발이다. 그러나 그 폭발은 오래가지 않는다. 불길이 지나가면 재만 남는다. 그 재 속에서 다시 권태가 피어난다. 반복되는 연소의 과정, 그것이 인간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리듬일지도 모른다.
어떤 철학자는 즐거움을 ‘소멸의 변장’이라 불렀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고, 쾌락은 소멸을 예고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소멸이야말로 인간이 욕망을 새로이 구축하는 방식이다. 즐거움의 폭발이 끝난 자리에는 언제나 잿빛 공허가 남고, 그 공허는 새로운 권태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권태는 인간이 살아가는 연료이며, 즐거움은 그 연료가 불타오르는 찰나적 현상이다.
백화점의 쇼윈도 안에 진열된 물건들은 늘 같은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앞에서 매번 다른 표정을 짓는다. 어떤 날은 그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어떤 날은 설명할 수 없는 열망을 일으킨다. 변화한 것은 사물도, 빛도 아니다. 권태의 밀도가 다를 뿐이다. 인간은 같은 풍경 속에서도 감정의 온도를 다르게 느낀다. 그래서 즐거움은 언제나 내부의 사건이지, 외부의 자극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왜 아무리 즐거운 일도 금세 시들해지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권태는 감정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다. 격렬한 즐거움은 그만큼 빠르게 권태를 부른다. 그것은 마치 한순간의 폭발 이후 찾아오는 무음의 잔상과 같다.
즐거움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이미 권태는 그 내부에서 자라고 있다. 폭발이 끝나면 남는 것은 침묵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다음 폭발의 가능성이 태어난다.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순환한다. 그 반복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솔직한 리듬이다.
어떤 예술가는 말했다. “즐거움은 감각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에만 가능하다.”
즐거움이란 예기치 않은 혼란 속에서만 살아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통제된 삶에서는 권태조차 희미하다. 권태가 흐릿해진다는 것은, 감정의 구조가 마비되었다는 뜻이다. 즐거움은 언제나 그 마비의 가장자리를 불태운다. 그러니 진짜 즐거움은 지루함과 불편함을 견딘 끝에 찾아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견딤의 시간을 잊고, 오직 폭발의 순간만을 기억한다.
카페의 남자는 잔을 비우고 일어선다. 거리의 불빛이 유리창에 겹쳐진다. 사람들의 얼굴은 빛의 얼룩으로 녹아내리고, 자동차의 엔진음이 낮은 진동으로 귓속을 채운다. 그 속에서 불현듯 살아 있다는 감각이 피어난다.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다. 그것이 즐거움의 본질이다. 이유 없는 감각의 발화, 권태의 표면을 뚫고 나온 생의 잔열.
권태를 피하려는 사람은 결국 즐거움도 피하게 된다. 즐거움은 권태라는 도화선을 태워야만 폭발한다. 그 도화선이 없다면, 삶은 아무 불꽃도 없는 냉각된 금속과 같다. 뜨거움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그 열을 두려워하는 모순된 존재. 인간은 그 사이에서만 살아간다. 권태를 견디는 일은 불행이 아니라 준비다. 도화선을 길게 늘이는 행위다. 언젠가 그 끝에서 일어날 불길은, 예고되지 않은 기쁨의 형상으로 세상을 잠시 밝힌다.
밤이 다시 깊어간다. 창밖의 가로등 아래, 불완전하게 타다 남은 담배꽁초 하나가 미세한 불빛을 품고 있다. 그 불빛은 작지만, 꺼지지 않는다.
한때의 즐거움이 완전히 사라진 듯 보여도, 그 잔불은 아직 타고 있다. 아무도 그것을 바라보지 않아도, 그것은 계속 타오른다. 권태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그렇게 은밀히 연소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도화선이.
아무 소리 없이 불붙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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