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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얼음 뼈 01화

프롤로그

얼음으로 만들어진 뼈.

by 적적


비가 내렸다. 바람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누군가의 칼날 같은 숨결을 따라가며 피부에 얇게 붙었다. 골목은 낮 동안 품고 있던 열을 모두 반납하고, 금속의 흉터만 남긴 채 어둠을 천천히 굴렸다. 오래된 냉장고에서 방치된 시간처럼 튀어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건물 사이를 떠돌며 벽의 표면을 얇게 긁었다. 흐려진 창문에는 온도의 차이가 남긴 투명한 문장이 들러붙어 있었다. 읽히지 않는 문장, 읽히지 않아 더 또렷한 문장.



사람들은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리며 걸었다. 겹겹의 천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은 마치 숨겨진 질문처럼 예고 없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귀 뒤를 파고들던 한 줄기의 찬기는 목덜미에 닿는 순간 체온을 비탈길 아래로 굴려 보냈다. 얼기 시작한 보도블록 위를 걸을 때마다 둔탁한 금속음이 들렸고, 그 소리는 숨을 멈춘 공기 속에서 길게 이어졌다. 누군가의 심장박동을 차갑게 변조한 듯한 소리.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플랫폼의 더운 공기와 바깥의 찬 공기가 충돌하며 만든 투명한 연기. 사람들은 그 연기 속을 지나며 잠시 더 오래 숨을 들이켰다. 금속 냄새, 젖은 흙의 무게, 먼 바람의 단면, 녹지 않은 눈의 냄새가 뒤섞였다. 겨울의 냄새는 몇 개의 감정을 함께 데려왔고, 그 감정들은 저마다 이름을 잃은 채 사람들의 어깨 위에 가볍게 앉았다.



편의점 앞 냉동고에는 성에가 얇게 피어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작은 얼음 조각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바닥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조각들이 남긴 흔적은 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겨울밤의 디테일은 이런 미세한 순간들로 구성되었다. 지나가는 빛의 껍질, 짧은 그림자의 호흡, 사라지는 냄새의 실루엣. 어떤 것들은 나타나는 순간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도로 위에서는 헤드라이트가 젖은 노면에 길게 번졌다. 같은 빛이지만 겨울밤의 조명은 한층 더 멀고, 더 단단하고, 더 잠잠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빛이 흩어졌고 그 흩어짐은 순간적으로 도시의 표정을 바꾸었다. 마치 도시가 아주 짧은 순간 다른 얼굴을 스쳐 보여주는 것처럼.



버스정류장의 투명 방풍막에는 보라색 광고가 붙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그 보라색을 품고 길게 늘어졌다. 장갑 속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휴대폰 화면의 푸른빛이 얼굴의 윤곽을 더 차갑게 드러냈다. 겨울밤의 바람은 스쳐 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자리까지 보듬어 쥐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몸을 기억했다. 뼈를 스치는 음영,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스며드는 찬기의 파편들. 이 계절의 밤은 누구도 완전히 따뜻하게 만들지 못하는 시간처럼 보였다.


골목 안쪽에서는 작은 식당들이 조용히 불을 밝혔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국물 냄새는 얼어붙은 걸음을 잠시 머물게 했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느껴지던 금속의 감각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몇 초 안에 사라졌다. 따뜻한 공기, 익어가는 채소의 향, 맞부딪히는 그릇의 울림. 겨울밤은 문 하나를 경계로 다른 세계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다시 거리로 나오면 추위는 즉시 몸을 찔러왔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남아 있는 빗물의 결, 희미하게 빛나는 회색 공기. 겨울밤은 이런 것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장면을 만들었다. 차갑고, 날카롭고, 필요 이상으로 조용한 장면. 모든 소리가 얼음 아래에 갇힌 듯한 장면.



전신주 아래의 가로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빛의 흔들림은 공기의 불안정한 표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눈을 조금 좁히면 가로등 주변의 공기가 얇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오래된 기억 속 풍경처럼, 빛은 현실보다 약간 더 낯선 색을 띠며 골목을 비추었다.



겨울밤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냉혹하지만 고요하고, 침묵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은밀히 알고 있는 얼굴. 이 밤을 걷는 존재들은 잠시 그 얼굴의 일부가 되었다. 비가 그쳐갈수록 공기는 더 맑아졌고, 바람은 여전히 살갗에 붙어 있었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만 느껴지는 견고한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겨울이 드러내는 어떤 진실 같은 것.



그 진실은 차가움 속에서도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온기의 형태, 빛의 방향, 사람의 높낮이, 마음속에서 흔들리는 결의 움직임까지. 겨울밤은 모든 것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선명해진 것들은 다음 계절을 견디게 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힘의 형태였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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