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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얼음 뼈 02화

무중력의 밤.

눈이 오기 전에 잠시 기온이 오르는 거야.

by 적적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던 어느 초겨울 날, 창문에 걸린 얇은 먼지가 빛을 받아 은밀하게 흔들렸다. 거리에서는 아직 첫눈이 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의 몸짓은 이미 눈을 맞은 듯 둔해지고 조심스러워졌다. 차가운 금속 난간을 따라 서늘한 기운이 번지고, 오래된 빌라의 벽면을 스치는 바람이 쓸쓸한 음색을 흘렸다. 불빛 하나 없는 복도에 놓인 젖은 경비실 장갑에서는 금세 식어버린 체온의 기척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그런 사소한 풍경들이 어떤 기억도 없고 어떤 장소에도 없던 ‘첫눈’의 감각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시작은 항상 정해진 날짜 없이 기분의 형태로 먼저 찾아왔다. 손끝이 조금 더 둔해지고, 옷깃을 세우는 각도가 서서히 달라지며, 사람들의 걸음에서 묘하게 절제된 속도가 감지되는 순간. 마트 냉동 코너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무 근거 없이 ‘오늘쯤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뚜렷한 기억은 없는데, 첫눈이 내리던 날에만 존재했다고 믿을 수 있는 냄새가 있었다. 오래 닫혀 있던 서랍을 열었을 때 풍기는 희미한 종이 냄새, 막 잠에서 깬 강아지의 몸에서 나는 따뜻한 숨결, 흐릿한 꿈 속에서 어딘가로 걸어가던 본능적인 방향감각 같은 것들. 실체 없는 감각들은 차갑고 미끄러운 겨울 공기 속에서 되살아났다.



어떤 계절의 시작은 날씨가 아니라 사라진 것들의 형태로 기록되곤 했다. 텅 빈 놀이터의 회전 바, 누군가 둔갑 놀이를 하듯 벗어놓고 간 스카프, 그리고 점점 말라가는 가로수의 마디. 이 모든 것이 ‘이제 곧 첫눈이 올 것’이라는 무언의 신호처럼 작동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미세한 긴장감도 같은 종류였다.



한 해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중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직접 말하지 않는 침묵의 기류. 그 속에서 겨울은 이미, 눈 없이도 도착해 있었다. 누군가의 머리 뒤쪽에서 반짝이던 짧은 머리카락 한 올이, 마치 눈송이가 빛에 스친 잔상처럼 보였고, 어두워진 골목길에 놓인 익숙한 간판의 파란 조명은 눈이 내리기 직전 하늘에서 반사되는 막연한 빛을 닮아 있었다.



첫 풍경은 직선보다 곡선으로 다가왔다. 건물 사이로 휘어진 바람, 코트 자락을 쓸고 지나가는 차가운 결, 이마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굽어 내려오는 방식. 그 곡선의 끝에는 어김없이 ‘하얀 것’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사실 본 적도 없는데, 한 번도 그 순간을 정확히 맞이한 적이 없는데도, 첫눈은 언제나 기억 속의 특정 좌표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한 번도 도착하지 않은 연인의 편지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대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부재가 오히려 존재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계산법. 기온이 조금씩 내려갈수록 그 부재의 감촉은 더 선명해졌다.



눈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시간이 아니라 온도에 반응했다. 새벽 다섯 시, 편의점 문이 열릴 때 흘러나오는 온기와 냉기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잠깐 머무르는 그 묘한 순간. 그 경계에 서 있을 때면, 입김의 모양이 마치 눈송이의 형태를 연습하는 중처럼 보였다. 그리고 출근길 버스의 창가에 앉은 누군가의 손등 위에 내려앉은 작은 먼지 알갱이가 순간적으로 언 듯 빛날 때, 첫눈이 내릴 때 느껴지는 ‘조용한 소동’이 예고 없이 되살아났다. 눈이 오는 날의 공기는 놀랍도록 소리가 없는데, 그 소리 없음 자체가 하나의 웅혼한 울림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먼저 기억해 냈다.



사람들은 종종 첫눈을 보며 어떤 약속을 떠올린다고 말하지만, 약속은 대개 눈보다 짧게 남았다. 오히려 오래 남는 것은, 약속이 이미 사라진 뒤에도 계속 내리던 감정의 잔여였다. 차창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녹아내릴 때 유리에 남기는 작은 물길처럼, 아주 오래전에 스쳤거나 혹은 아직 오지도 않은 감정이 고요하게 흔적을 남기는 방식. 그 흔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은폐되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기억 속의 첫눈도 그런 종류였다. 존재하지 않는데도 계속 존재하는 것, 한 번도 경험된 적 없는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풍경.


점점 더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퇴근 무렵이면, 첫눈이 내릴 것 같은 기척은 더욱 짙어졌다. 어둠에 가까워질수록 빛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는 법이었다. 거리의 횡단보도 위로 떨어지는 신호등의 흰빛은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무정한데, 이상하게 그 아래에 잠시 멈춰 선 사람들의 표정은 눈이 내리는 날처럼 부드러워졌다.


공기의 밀도가 하루 중 가장 묵직해지는 시각, 누군가의 가벼운 한숨이 날숨의 온기를 벗고 사라지는 방식이 첫눈의 속도를 닮아 있었다. 고요한데 분명히 움직이고, 낮은 곳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



어쩌면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실제로 겪은 순간보다 겪지 못한 순간들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눈을 본 적이 없어도, 혹은 그날의 풍경이 기억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쉽게 반응한다. 실존하지 않는 계절이 마음속에 층층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절들은 대개 지금 이곳의 온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가능성 온도에 가까웠다. 가능성은 기억보다 오래 남고,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상처를 남긴다. 첫눈이 주는 감정도 그러했다. ‘한 번도 시작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황망한 애정 같은 것.



날이 깊어갈수록 건물들은 저마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사람들은 그 그림자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눈 내리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지하철 출입문이 닫히는 순간의 규칙적인 파동조차 바람의 결에 닿으면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마치 도시 전체가 첫눈을 맞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기다리는 것처럼. 신호등이 세 번 바뀌는 사이, 공기 중의 미세한 습기가 조금 더 차갑게 응결되는 방식은 ‘눈이 오기 직전의 밤에만 존재하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가본 적도 없는 풍경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결국,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 두는 일과 비슷했다. 그 자리는 누구에게도 내주지 못한 채 반쯤 비어 있고, 반쯤 차가운데, 이상하게도 온전한 형태로 머물렀다. 첫눈을 기다린다는 감정은 누군가의 이름을 오래된 메모지에서 발견했을 때의 느낌과 닮아 있었다. 오래 잊고 살았던 어떤 마음의 원형이 다시 눈을 뜨는 순간. 선명하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첫눈에 대한 그리움의 진짜 얼굴이었다.



마침내, 창문 밖 기온이 더 떨어지고 밤이 낡은 천처럼 축 늘어지던 어느 순간, 공기 속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향도 없는데, 공간 전체가 갑자기 더 가벼워지는 느낌. 시간의 입자가 다시 배열되는 듯한 기묘한 낯섦. 눈이 내리기 직전, 세상은 잠깐 무중력처럼 변했다. 그 무중력의 틈에서, 아직 오지 않은 첫눈을 향한 그리움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순간, 현실의 풍경보다 오지 안

은 풍경이 더 실제가 되었다.


12월의 첫눈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


그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이미 내렸다.


실제보다 먼저 도착한 감정이 풍경을 미리 점령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억을 미리 만들어냈다.


첫눈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리움은


이미 곳곳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보도블록의 이음새, 전봇대의 거친 표면, 마른풀 위에 남은


누군가의 발자국 옆에.


12월의 공기가 조금만 더 흔들리면,


그곳에서 첫눈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가본 적도 없는데, 이미 그리워지는 풍경.


겨울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은 순간.




그림자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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