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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짜이 Aug 08. 2021

우리 애는 책을 안 읽어요

근거 없는 믿음이 하나 있었다. 우리 애들이 딴 건 몰라도 책은 좋아할 거라는 . 아마  책에 중독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랬나 보다. 아무도 시킨 적 없는데 1년에 백권 넘는 책을 읽고 독서록을 만들어 선생님께 검사해달라고 가져고, 독후감이나 글짓기 대회 열리면 못 나가서 안달 났던 유난떠는 어린이가 나였다. 남편도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책을 아주 많이 읽은 아이였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에이브 전집을 잊지 못해 비싸게 중고로 다시 사들여서 소중히 여긴다거나, 가끔 맥락이 전혀 없는 책들을 한꺼번에 주문해서 읽는 걸 보면 그 역시 책을 애정 하는 사람이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리의 아이 책을 좋아하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세 살 첫째 아이는 책 좋아하기는커녕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그나마 코로나로 집안에 갇히면서 읽은 것이 해리포터 시리즈, 그것도 매일 백 페이지씩 읽으면 뭘 사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부터였다. (닌텐도) 그렇게 재밌는 책을 백 페이지만 읽고 끝낼 순 없을 거라는 나의 속내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는 매일 정말 딱 백 페이지까지만 읽었다. 해리포터가 처음으로 다이애건 앨리에 가는 그 재미있는 순간에도 백 쪽이라며 끝! 볼드모트와 대면하는 살 떨리는 장면에서 가차 없이 오늘은 여기까! 퀴디치 시합이 아슬아슬하게 역전을 거듭할 때도 백 쪽 읽었 끝! 하며 책을 덮는 걸 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부글부글 이 끓었다.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는 장면에서 그만 둘 수가 있 나에게 아이는 그건 엄마 생각이고~ 라면서 더 어이없어했다. 어쨌거나 아이는 1년 동안 26권해리포터 대장정을 쳤고 닌텐도에 흥미를 잃었는지 그냥 데스크톱을 사달라고 했다. 줌 수업도 해야 하고 인강도 들어야 하고 숙제할 때도 필요하고 어쩌고 했지만 실은 게임을 보다 실감 나게 하기 위한 거란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안다. 그렇게 해리포터와 맞바꾼 컴퓨터 속에서 아이는 신나게 무언가를 짓고 부수고 싸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해리포터 백 쪽은 칼같이 지키더니 약속한 게임 시간이 끝나면 나라 잃은 백성처럼 서글퍼하며. 이렇게 부모가 되면 절대로 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또 하나의 결심이 무너졌다.


일곱 살이 된 둘째도 징그러운 뱀이나 다리 많은 곤충이 나오는 책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엄마가 책 읽어줄게 가져와~라고 하면 엄만 이야기책만 좋아하잖아 난 싫어~ 그러면서 총총 가버린다. 우리 집엔 무려 디즈니 명작동화 초판 시리즈가 있는데 추위를 싫어한 펭귄, 단추로 끓인 수프 같은 인생 명작을 읽어주어도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도 써보, 책에 나오는 장소에 찾아가고, 작가의 강연을 그런 장면은 영영 이룰 수 없는 걸까. 얼마 전 엄마와 아이가 오직 책을 더 많이 깊이 즐겁게 읽기 위해 홈스쿨링을 택서 책과 함께 하는 여행과 편지를 주고받는 책을 읽는데 부러운 걸 넘어서서 안함이 밀려왔다. 아니 다른 애들은 이러고 있는데 우리 애들은 뭐 하는 거지? 공부는 못해도 책이라도 읽어야 할 텐데...


물론 공부는 못해도 책은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 자체가 뭐랄까, 부끄럽고도 비윤리적으로 느껴지긴 . 지금까지 난 책을 언가의 수단으로 여기는 모 행태에 분노해왔기 때문이다. 연령과 수준에 맞게 차근차근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라던가 독서골든벨 같은 행사, 독서지도, 독서논술, 독서토론 같은 단어를 들으면 필요 이상으로 짜증이 났고 부모들이 무심코 하는 말. "우리 애는 책을 안 읽어서 큰일이에요. 책을 안 읽으니까 독해력도 떨어지고 서술형 문제도 못 풀잖아요." 라는 말을 들으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 중에 책을 읽는 아이가 있는 거지, 책을 많이 읽어서 공부 잘하는 게 결코 아거예요." 나불대곤 했다. 왜냐, 내 자식이 이렇게 책을 안 읽을 줄은 몰랐거든요...


맥 빠지 한편, 만약 아이가 나처럼 유년시절을 책으로만 보낸다 하면 그것 또한 꼴 보기 싫을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시간. 교실에서 홀로 남아 책 읽던 사람 나야나. 은 운동신경이 너무 없어서 고무줄 놀이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두꺼운 안경에 보기 흉할 정도로 말라서 소말리아라고 놀림을 받아야 했을 때도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고등학교 때 억울한 누명을 받았을 때도 책만 읽었다. 달리 해명을 할 용기가 안 나서.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안나오는 현실을 잊고 싶을 때, 인간이 싫어질 때, 헛된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 책을 펼친다. 나의 독서 세계는 편협하기에 자기를 발한다거나 인문의 지경을 넓히지는 못한 채 주로 한국문학에 집중되어 있다. 이 희망없는 시장에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날개를 달고 등장한다. 책은 나만의 비상구이자 분출구, 도피처. 많은 것을 보게 하고 울게 하고 웃게 하고 존경과 찬사를 바치게 하는 대상. 그러나 한편으론 위기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염세적이면서도 과한 낭만주의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너무 읽어도 싫지만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는 이 심정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모의 욕심일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은 책을 안 읽어도 할 건 다 한다. 얼마 전 아이가 학교에서 쓴 시를 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좀 놀랐다. 다소 우울한 구석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격동의 사춘기를 살아내고 있단 걸 글로 표현할 수 있구나 싶어서.  


어째 열세 살이나 마흔세 살이나 세상 사는 건 비슷한 거 같.


책 보다 신선하고 자극적이고 재밌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이의 인생에서 손꼽아 좋아하는 작가가 한 명쯤 생기길 바란다. 밤새 기다려 듣는 가수의 신곡처럼, 부자가 되면 집에 걸고 싶은 그림처럼, 두 달치 월급을 모아 떠나도 아깝지 않은 여행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누추하고 초라한 인생을 좀 더 깊고 아름답게 빛나게 해 줄 것을 나는 믿는다. 혹여 아들아, 아주 나중에라도 우연히 이 글을 읽게된다면 살짝 댓글 남겨줄래? 그런 책 생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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