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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02. 2020

기생층에 산다고 남의 피를 빨진 않는다.

82년생 지하집 생활자



중학교 1학년, 같은 반 첫 짝꿍 이름이 나와 같았다. 성만 달랐다.  이거 미있는 인연이구만.

 

아담한 키에 토실토실한 얼굴, 애완 아기돼지같이 귀엽게 생긴 녀석이었다. 귓불이 무지 커서 무슨 석가의 제자 같기도 하고 여하튼 첫인상은 덕스러운 캐릭터였다. 그런데 첫인사가 인상을 박살 냈다. 


"너 부천 산다며?"

"어."

"부천 어디 는데?"

"원미동."

"거기가 어딘데?"

"춘의사거리쯤? 너 부천 알아?"


"알지. 거기 판자촌 아니냐? 달동네잖아. 못 사는 사람들 사는 데. 너 판잣집에서 사냐? 비 새고 화장실도 없지?"




최근 공사가 반지하 공간 활용 프로젝트를 야심 차게 준비하며 공간에 작명을 붙였다 여론의 호된 질타를 맞고 간판을 내렸다.


이름하여 「기생층」


입맛을 다시며 기사를 읽었다. 회가 생기는 층이라고? 무슨 기회? 빛을 받을 수 있는 기회? 가진 개뿔 없는 너희들에게 주는 특별한 '특혜'?


이거 혹시 그 자식 같은 인간이 지은 이름 아닐까?


듣자 하니 그 녀석 할아버지가 레미콘인지 시멘트인지 회사의 장이라고 했다. 늘 돈 있고 빽 있는 친구들만 집으로 초대했다. 그 집에 놀러 갔던 친구들은 종종 걔에게 한 마디씩 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청소하고 집안일 봐주시는 분한테 이 년 저 년이 뭐냐?


 그럼 걘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XX 년 잘라버리려고. 일도 X도 안 하고 X 같은 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쌍욕을 해대는 녀석의 주둥아리에 곧 질려버렸다. 내 이름을 달동네라 부르고 다닌 그놈에게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유 그래 니 맘대로 떠들어라.


집에서 그렇게 가르친 걸 걔보고 어쩌라고?


요즘 재벌 3세 4세 '사장님'들의 온갖 갑질 행태에는 자신을 보좌해주는 사람들을 쓰고 버리는 노예 정도로 취급하는 배경이 자욱하게 깔려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것이다.



우리 집이 삼청동으로 '복귀'한 중2 가을날, 경복궁 길을 따라 터벅터벅 내려오던 중에 누가 나를 한 참 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녀석이다. 뻑적지근한 검은 차 뒷좌석에 앉아 창문을 빼꼼 열고서는 히죽히죽 댄다.


"너 여기 왜 있어?"

"왜 있긴. 여기 사는데."

"삼청동?"

"어."

"어얼~~~ 앞으로 종종 보자!"


지 말만 하고 전용 기사 어깨 툭툭 쳐서는 쌩 가버린다.  


그래.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듣자 하니 녀석은 명문대를 기부금 입학으로 들어갔단다. 할아버지가 대학교 잔디를 싹 깔아줬다나 뭐래나.




나는 봉 감독의 칸 영화제 수상부터 뭔가 '수상'했다.  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한국사회의 계급 차이와 인식을 보여준 획기적인 영화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데 아 그래 뭐 외국인이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어 짝짝짝 해줬다. 그런데 아카데미 수상까지?


야. 누가 보면 반지하 사는 사람들 다 치졸한 줄 알겠다.


적어도 시나리오를 쓰려면, '페이크 리얼리즘'이라도 쓰려면 감독은 최소한 3년 정도 반지하에서 지내보며 깊이 느낀 점에 대해 영상으로 표출해야 했다. 하물며 박완서의 소설처럼 가난 행세라도 도둑질해서 맛이라도 봤어야지. 하지만 그는 그냥 스윽 훑어보고 자신의 아이디어에 맞게 반지하 생활자의 내면을 각색했다. 아니, 심각하게 왜곡했다.


위에서 보면 집 바닥 틈 속의 벌레처럼 보이겠지.


 봉 감독이 희롱한 건 계급 차이와 인식이 아니다. 반지하 생활자의 계급 대응방식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봉 감독은 반지하 생활이 만연한 한국사회를 기만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 주변의 '가난뱅이'들은 그렇게 추잡스럽게 돈 많은 인간한테 모기처럼 달라붙어 더러운 피를 빠는 인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강북의 핫 플레이스라고 부르는 삼청동에 반지하 전세 2천만 집이 있었다고 하면 여러분 믿겠나? 믿건 말건 난 그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우리 집은 사실상 지하였다. 그저 천장이 닿을 듯 말 듯 한 꼭대기 작은 창문에 조금 볕이 드는 정도였다. 듣기로는 예전에 두부 만드는 곳이었다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은 아니었다. 약간 교도소의 독방 같은 느낌도 났다.  

 

가장 큰 고통은 추위였다.


아침에 깨어 후 하고 숨을 내 쉬면 입김이 났다. 12월에 접어들면 집 안 새벽 공기는 영하 1~2도를 밑돌았다. 15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네 사람이 고 먹고 씻고 쌌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누가 물어도 떳떳하게 대답할 순 있었다.


우리 가족은 멀쩡한 사지로 멍청하게 앉아 피자 박스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빠는 신불자였지만 택기 기사는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식당 서빙을 했다. 나와 동생은 장학금을 받으며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다녔고, 각종 알바를 뛰어 생활비를 충당했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바로 취직해서 집안 형편을 일구어 갔다. 그렇게 10년을 지하에서 버텼다.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아빠도 신불자의 딱지를 뗐다.


우리 가족은 성실 근면의 방패를 집어 들고 빚더미를 밀고 또 밀고 나갔다.


볕 좋은 날 빨래를 널면 지하의 곰팡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말했다. 사람이 없을수록 옷은 깔끔하고 좋은 걸 입으라고. 어디 가서 쫄지 말라고. 돈이 없다고 해서 자존심까지 팔아먹지 말라고.


내 동생은 손의 지문이 인식이 안될 정도로 연필과 펜을 쥐었다. 나는 컴컴한 지하 속 스탠드 불 앞에서 손난로를 쥐고 두 편의 수상 논문과 두 편의 KCI 논문을 발표했다. 동생은 대기업의 통번역사가 되었고, 나는 전공 따라 연구직 공무원이 되었다. 시험 쳐서 정정당당하게.


영화의 눈으로 보면 계획엔 없던 내용이겠지.


영화에선 대궐집 아이들에게 고급 과외를 시켜주고 아이에게 혹시라도 해가 갈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물리치느라 부모가 별갖 유난을 다 떤다.


너가 바보가 아니란 걸 세상에 스스로 증명해봐.


아빠는 보호가 아니라 생존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잔머리? 뒤통수? 진짜 고난이도의 전술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지구력을 키워가는 것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한 손엔 방패를 한 손엔 창을 들고서 막고 찌르고 막고 찌르고를 반복하며 그렇게 세상 속의 내 영역을 만들어다. 그렇게 한 분야에 10년을 종사하니 '벌레 인간'은 각종 살충제에 면역력이 붙었다.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았다. 더 커졌다.


와라. 실력으로 붙어보자.


끗발 날리던 대궐집 옛 도련님 규수님들 중 적지 않은 인간들이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모의 집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씁쓸한 얼굴을 애써 가린 채 두툼한 지갑만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건 마치 몰락한 중세 귀족의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


돈으로 사람을 만나면, 돈이 떨어지면 사람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 잘난 도련님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 취급 안 해줬던 옛 도련님 한 분을 허허 공교롭게도 같은 대학교 입학식에서 만났다. 어라? 리치 프렌즈만 만나던 양반 어르신께서 왜 최상위 학교로 안 가시고 중상위권 학교로 오셨을까. 신의 장난인가. 우리는 같은 사회 인문계열로 묶여 있었다.


나는 문과대 롹밴드 보컬 오디션에 합격하여 복받친 나의 분노를 하드롹, 헤비메탈로 뿜어냈다. 마침 공연날, 노천극장에는 그 도련님께서 앉아 계셨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재밌는 노래 하나 불러줬다.


건즈 앤 로지스의 '노킹온 헤븐스 도어'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도련님은 종적을 감췄다. 갑질에, 가혹행위에, 각종 인신공격에, 그것도 재수 없는 폭행에 떡 하고 뻗을 사람인지 아닌지는 눈 크게 뜨고 잘 봤어야지 이 친구야.


대한민국의 반지하 거주자들을 돈에 눈이 멀어 벌벌기는 해충으로 매도하지 마라. 당신도 언제든 그 자리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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