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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pr 13. 2020

82년생 남자는 왜 아이를 낳지 않을까?

82년생 육아 대디



<세계적인 이야기 : 인류의 감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류의 감소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때문에 어떠한 인구 부양책을 내놓더라도 실효를 보기 어렵다.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인류의 평균 수명은 40세를 넘지 못했다. 인간은 질병, 전쟁 등에 의한 이 짧은 인생의 마감으로 인해 자신이 채 이루지 못한 ‘자신의 미래’를 이어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번식 활동을 해 왔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들, 손자, 증손자로까지 이어지는 1세기 이상의 증가된 삶이 개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이렇게 해다오.”하는 유언을 남기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많아졌다. 인간은 더 이상 또 다른 나를 만들어야 할 당위성을 잃어버리게 된, 다시 말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의학의 발전은 거꾸로 인류의 종족번식을 부정하는 역류를 만들어 냈다.

자식이 나를 대신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비혼율이 폭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값이다. 나는 누구일까? 백 년의 삶을 어떻게 가꿀 수 있을까? 내가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그림은 더욱 또렷해지며, 타인과 나의 구별 짓기는 나노 단위 수준으로 세밀해져 간다.

로봇의 급속한 진화는 인류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하나둘씩 제거해 나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인간의 직업을 앗아갈 것이다. 이미 급속 진행형이다. 그동안 우리가 굳게 믿고 있었던 인간 노동의 신성성은 파괴되고, ‘내가 이 사회에서 존재해서 무엇하지?’라는 삶의 회의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던지는 과정으로 옮아간다.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에게 집단이 부여한 역할이 있었다.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나는 이런 사람이오.’ 하는 직업과 직분이 있어 정체성에 대한 가늠자가 명확했다. 지금은 로봇이 나를 대신해 말한다. ‘제가 하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사람은 말한다.


‘고마워. 근데 말야. 난 뭘 하지?’




<내 주변의 이야기 : 아버지의 부재>

내 주변엔 ‘독특한 가정’ 환경의 ‘슬픈 아버지’를 둔 82년생 친구들이 꽤 있다. 각각의 사연이 너무나 절절해서 나로서는 뭐라고 딱히 위로의 말도 해 줄 입장이 못 된다. 아주 친한 친구들의 몇 가지 사례만 추려다.

A군 : 아버지가 중학교 때 병으로 돌아가심. 이후 어머니를 보살피며 지금까지 건설 현장일로 생계를 꾸림. 미혼.

B군 : 아버지가 선천적 정신질환자임. 형, 누나도 정신질환자임. 본인은 정상. 어려운 환경에서도 꾸준히 요리를 배우고 익혀 레스토랑을 차림. 사업이 번성하여 4개 식당을 운영하고 있음. 기혼. 아이 없음. 반려묘 8마리를 키우고 있음.

C군 : 아버지가 알콜중독자임. 현재 통원치료 중. 어머니가 공장 근무 중 손가락 절단 사고를 입음. 컴퓨터 분야 업계에서 근무하며 생계를 꾸림. 미혼.

D군 :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집 나가 딴살림 차리고 종적을 감춤. 어머니는 하체마비 질병을 앓고 계심. 형은 미국으로 떠났고, 본인이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 대기업 퇴사 후 편의점을 운영하다 최근 새로운 사업 구상 중. 미혼. 반려묘 1마리를 키우고 있음.

E군 :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자살. 모든 활동을 접고 인도네시아로 이주함. 미혼.

A군은 늘 술자리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마치 오늘 아침 만난 것처럼 말한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불편하다. 한 번은 어느 한 친구가 그만 좀 해라 했다가 아주 난리가 나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만다. 자신의 가정을 꾸릴 여력도, 의지도 없다. 지금을 살뿐이다. 돈은 없지만 부르는 친구가 많아 자주 술자리에 나간다. 어머니에게 지극 정성 효도한다.

B군은 집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다. 대신 사업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유전적 위험으로 인해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대신 아내와 8마리의 고양이를 자식처럼 키운다. 친구를 무척 좋아해서 술자리가 많다. 어머니에게 지극 정성 효도한다.

C군은 일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번 물어봤다가 그가 갖고 있는 마음속의 들끓는 분노에 놀라 다시는 이 문제는 들추지 않는다. 섬세하고 말로 쉽게 상처 받는다. 어머니에게 지극 정성 효도한다.

D군은 ‘아버지가 뭐야? 먹는 거야?’ 해학으로 푼다. 늘 친구들 고민을 잘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으면 수중에 있는 돈도 다 빌려준다. 친구한테 끔찍하게 잘해준다. 어머니에게 지극 정성 효도한다.

E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타국에서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있을 뿐이다. 많은 주민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삶의 질을 높이려 노력하고 있다.

이 다섯 친구들에겐  공통 특징이 있다.

1. ‘내 사람’에게는 한 없이 자애롭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준다. 상대의 상처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다. 삶에서 차지하는 친구의 비중이 매우 크다. 마치 자식 걱정하는 엄마 모습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대다수가 엄마에게 지극 정성으로 대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 준 유일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2. 가정을 꾸리는 문제에 취약하다.


이것은 돈이 있냐 없냐의 문제와는 다르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는가 이 근본적인 인간관계의 문제를 애써 풀려고도 하지 않고, 풀려고 해 봐도 그 스스로가 매우 복잡하게 생각해버려 해결 불가능한 미제로 남는다.

 3. 아이에게 사랑 주는 방법을 모른다.

이들은 아이에 별 관심이 없다. 보통 사람들이 아이를 보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거나, 악수를 청하거나, 간식을 주거나, 또는 안아주거나 하는 모습들이 이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신기한 눈으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대하는 아이의 반응을 지켜만 볼 뿐이다. 아이의 변칙적인 행동에 당황스러워하기도 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뭘 받아봤어야지.


이들에게 아이는 매우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서 별 관계가 없는 존재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아이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도 느껴진다. 사랑을 받아 본 시간이 너무 짧거나 또는 사랑 자체를 받아보지 못했거나, 사랑은커녕 버림받아 ‘아비 없이 큰 놈’이라는 좌절감이 응어리로 져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대와 좌절, 한 맺힌 분노가 화산처럼 솟아 있다.


내 불행은 절대로 여기서 끝이 나야 한다.



사랑 이야기를 뺀, 한국 가요사에서 ‘꿈’을 주제로 한 노래에는 고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왜 고독하죠?’라는 질문에 나훈아(’ 72/꿈속의 고향)는 성공을 위해 멀리 타지에 나와 고향의 어머니에게 문안드릴 기약이 없다며 하늘의 별을 세는 것으로 슬픔을 달랜다. 꿈은 어머니다.

조용필(’ 91/꿈)도 고향을 그리기는 마찬가지이다. 남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지만, 나만 내려갈 수 없는 그 비통함을 털어놓는다. 여기서도 별이 나온다. 다만, 별을 세지 않고 별에게 묻는다. 나의 꿈을 아느냐고. 고향의 향기를 그리워할 뿐, 구체적으로 고향의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는다. 그에게 꿈은 화려한 도시에서의 성공이다.

박효신(’ 16/꿈)은 꿈에서 나를 본다. 노래에서 고향은 없다. 누군가를 의식하여 느끼는 소외감을 털어놓는 것도 아니다. 그저 또 다른 자아와 끊임없이 주고받는 몽환적 대화이다. 별은 밖에 있지 않다. 내 작은 가슴 한쪽에 실낱같이 빛나고 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작은 별 하나가 저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은 위태롭고 위험하다. 그러나 내일이 오기에 아직은 무너지지 않았다. 꿈은 나를 지키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꿈은 고향을 떠난 타지, 그것도 멋진 도시에서 이루어져야 할 어떤 ‘성공’이다. 이것을 달성하지 못하고서는 고향에 내려갈 면목이 없다. 꿈은 단란한 가족을 꾸리는 것 그 이상의 무엇, 대개 돈과 권력이다. 이렇게 힘든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가족들은 반드시 이해해줘야만 한다. 그때가 올 때까지.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고 아들은 알고 있다.  화려한 도시에 오면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아버지는 술에 취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시도하고, 집을 버린다. 아버지도, 아들도 울화통이 치민다. ‘어떻게든 해보자’에서 ‘어떻게든 되겠지’로 주저앉고 만다. '아버지 없이 큰 자신'혈육의 꿈을 키워준다는 것은  그대로 꿈속의 일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겉핥기 설문조사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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