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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Sep 11. 2020

네안데르탈인이 남겨준 내 '얼굴털'

네안데르탈인을 보살펴주는 아내



 내 얼굴에는 털이 많이 난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일명 '얼굴털 관리칼'이라는 게 있다. 잔털을 그대로 두면 스멀스멀 올라와 어느새 얼굴이 마치 탄 것처럼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수염에 버금가는 굵은 털이 뺨 주변에 난다는 점이다. 찬호박처럼 멋있게 나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겠지만 뺨 사이사이에 듬성듬성 난다. 이틀 이상 그대로 두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 저 사람은 왜 뺨 한가운데에 수염이 나지?"

수염을 포함한 굵은 녀석들은 면도할 때 삭 밀어내면 해결이 된다. 그러나 잔털은 면도칼로 밀면 상판이 상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격이다.

잔털은 아내가 관리해준다. 주말이 되면 "곰돌이 얼굴털 밀자" 한다. 그럼 젤과 커트 칼을 들고 가서 얌전히 곁에 눕는다. 이 잡초들은 방치하면 결국 얼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매주 한 번씩은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먼저 이마의 잔털을 가볍게 밀고, 눈썹의 라인을 명확하게 한다. 뺨에 잔뜩 바른 젤 위로 날카로운 날이 사사삭하고 들어와 시원하게 벌초를 한다. 다음턱이다. 턱에도 미세하고 길게 늘어진 수염들이 많아 이마저도 깔끔하게 털어낸다. 마지막으로 귀 언저리 사이의 잔여풀까지도 착착착 밀어낸다. 이렇게 숫돌에 북북 갈은 낫으로 갈대밭 밑동까지 밀어내면 시원한 쇳바람이 인다. 아내는 말한다.


와 얼굴크다.


넓적한 얼굴에 뭉뚝한 코, 두툼한 입술. 영락없는 아프리카계 인간이다. 우리는 내 얼굴을 보면서 유발 하라리의 '인간'을 이야기한다. 나는 고생 인류의,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합 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지금 우리 집에 나만큼 얼굴 큰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아주 극 원초적인 유전자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 어글리 한 상판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낀다.

조심조심 작업을 마치면 세면대로 가 따듯한 물에 얼굴을 씻는다. 그리고는 다시 아내가 미스트를 얼굴 전체에 착착 뿌려준다. 비가 내린다. 잠시 현대인이 되었다. 뭔가 경건한 의식을 치룬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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