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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 Jun 08. 2022

데미안

안에서 나와 사랑들을 마주하기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왜 알을 굳이 깨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지, 운명은 무엇인지는 사실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금 삶에 만족했고 만족하고 있고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따뜻하고 안락한 알 속은 깨기 싫은 나의 유일한 세상이고 애정이고 집착이었다

그래서일까 과거의 나는 데미안을 두어번 읽었었는데 매번 큰 귀감을 얻지 못했다.

단지 어린아이의 공포의 묘사가 참 생동감 있어서 인상적이었고, 데미안은 이상적이었으며, 알을 깨기 위한 투쟁이 있었고, 선과 악은 분리될 수 없다. 딱 그뿐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알이 깨져버렸다.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을 겪게 되겠지요.

하지만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거라는 데미안의 대사처럼, 알이 갑자기 깨져버렸다.

알의 깨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바람에 두려워하며 웅크려있는 내가 있었다.

데미안에서는 새는 알을 깨기 위해 투쟁한다고 표현했는데, 나는 깨진 알속으로 불어들어오는 차가운 대지의 바람에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듯하기도 하다.



삶과 죽음과 운명과 사랑

갑작스러운 운명에 그래, 운명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데미안을 다시금 만나게 되었다.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싱클레어의 변화와 성장이 이전과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절실한 사명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다.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의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시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왜곡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싱클레어의 외부에서 생기고 주입된 세계가 데미안을 만나 점점 내부로 옮겨져 간다.

그것은 결국 성장의 흐름이었다.

외부의 모습들은 결국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명은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사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는 어려운 말이다. 다만 지금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안의 진실한 목소리 정도로.)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찾을 때 항상 데미안은 결국엔 나타났다. 하지만 앞으로는 못 볼 것처럼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안에서 자신을 찾으라 하며 에바 부인의 입맞춤을 옮기고 사라진다.


꿈과 사랑만큼은 변함없이 양지로 그려지는 소설 속에서 싱클레어는 아픔과 고독을 거쳐 사랑과 존경과 꿈과 길을 모두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흡사 데미안이 된 모습이 된다.

그리고 이는 싱클레어의 성장의 마지막 페이지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와의 마지막 만남을 보고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성장(나 자신을 아는 것)은 사랑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


싱클레어의 진짜 알은 어쩌면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존경하고 사랑한 그들이 싱클레어의 가슴에, 안에 남는 것으로 싱클레어는 더 깊은 나로 들어갈 수 있게 됐고, 싱클레어는 정말 홀로 날 수 있는 새가 된 것이 아닐까.


성장은 꼭 해야 하는 걸까? 과거의 나는 단언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인 것 같다.

세상은 안락한 알의 형태를 할지언정 계속해서 바뀌고 깨지는 것을 반복한다.

때문에 성장, 즉 나아감은 불가피하다.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성장이고 운명이라면, 마주 봐야만 하겠지.

나도 투쟁하며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겸허히 걷기로 했다.


내 안에서 나 자신과 사랑들을 마주하며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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