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굴개굴
남들이 “맞다”라고 생각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끌렸다. 정확히 말하면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코 하고 싶은 쪽이었다.
예체능은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담임 선생님과 '돈 많이 든다’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나에게 미대 입시란, 대놓고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고, 미술학원을 가기 위해 당당히 야자를 쨀 수 있는 완벽한 이유를 선사했다. 그런 이유로 “미술은 내 천직이구나”라 믿었다. (물론 천직이 아니었다.)
수능날, 점심을 먹고 체했다.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수능 성적은 평소와 차이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던 덕분에 타격이 크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친구였다. (300명 중 200등 정도 했던 것 같다.)
내 목표는 인서울이 아니라 19년 나고 자란 울산 바닥을 뜨는 것이었다. 이 바닥을 어른들의 지지하에 떠나려면 대학에 가야 했다. 공부는 애초에 글렀으니 실기로 가자. 그러나 자신 있었던 실기 마저 당일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입학의 기회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후보 번호도 뜨지 않는 명백한 탈락. 100% 비자발적 재수가 시작됐다.
내가 재수라고?
또 수능을 치르고, 실기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대학을 가야 한다고 믿었던 친구들과 달리, 입시 실패는 곧 공장 직행이라 생각했다. 공장 취업을 알아보려던 차, 3개의 대학을 시원하게 날려 보낸 딸을 말없이 지켜보던 엄마는 울산 바다 앞의 어느 횟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회 한 접시와 소주 한잔. 엄마의 위로주는 나의 첫 음주였다. 대학 한 번만 더 준비해보자. 회 한 접시를 비우고 곧바로 장을 보자며 들렀던 홈플러스에서 갑자기 취기가 올라 “앞이 안 보인다”며 허공을 허우적대며 진상 짓을 한 것이 진정 나의 재수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그래. 딱 한 번만 해보고, 안되면 그때 공장 가자.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렇다고 넉넉한 집도 아니었다. 미술학원도 모자라 월 100만 원이 넘는다는 재수학원까지 보내달라고 하기엔 나도 눈치가 있다. 부모님도 먼저 학원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걸 보아 어떻게든 혼자 공부를 해야겠거니 단념했다.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지만 버스요금은 성인요금을 내야 하는 애매한 신분. 더 이상 당당히 용돈을 요구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공부하면서 용돈도 벌 수 있는 독서실 총무 알바를 시작했다. 아침 8시 독서실 문을 열고, 눈치껏 복도와 내부 청소를 한 뒤 카운터를 지키며 공부를 했다. 저녁 시간을 담당하는 친구가 오면 그제야 백색소음이 흘러나오는 독서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단 재수를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이라는 거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은 재수를 해도 고3 때 성적과 같거나 오히려 더 떨어지기도 한다며 불길한 소리를 해댔다. 그런 내가 혼자서 공부를 한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선택지는 없었다. 재수를 시작하고 2개월, 6월 모의평가 시험을 등록하기 위해 들렀던 재수학원의 직원은 독학을 하고 있다는 나의 말에 “어머, 학생! 결국 학원 등록하러 오게 될 거예요.” 라며 나의 계획을 저주했다. 조용히 쌓아온 불안과 외로움이 그녀의 말 한마디로 터졌다.
좋아.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불안함은 이상한 분노와 승부욕으로 타올랐다. 나의 입시 목표는 엉뚱한 방향을 목표로 질주했다. 독학으로 고3 보다 더 나은 성적을 내고, 더 나은 대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재수학원 직원에게 증명하겠다! 나같은 학생도 있다는걸! 그렇게 독기를 품고 친구들의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도 참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땐 그랬다.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에 합격했다. 내 생애 첫 합격이었다. 홍대와 함께 지원했던 나머지 3개의 대학은 모두 안드로메다 행이었다. 홍대에 붙은 친구들은 최소 2개 이상의 대학에 합격해서 홍대를 선택해서 오는 경우가 99%였다. (그래서 홍대는 나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게 발표했다. 나쁜 놈들.) 나는 홍대를 선택해서 갔다기보다는 홍대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고3부터 총 7개의 대학을 지원했는데 그중 합격한 대학은 홍익대학교 하나라니. 재수에 대한 선택지, 학원에 대한 선택지가 없었던 것도 모자라 입학할 대학에도 선택지가 없다니. 내 인생에 선택권을 가져보는 호사는 누리지 못하는 인간인가 싶었다.
대학 발표 전, 미술학원 선생님은 수능 성적이 잘 나온 나에게 “지수야. 너 홍대랑 건대 둘 다 붙으면 어디 갈래?” 라며 혼자 김칫국물을 마시곤 했다. 내가 심드렁하게 “건대?”라고 답하면 선생님은 "홍대를 가야지 제정신이냐"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결국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나는 모범학생이자 효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나는, 홍대를 갈 마음이 없었다. 인생은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물론 홍대면 닥치고 갈 것이지 무슨 말이 많은가. 입시 생활이 끝났음에 감사하며 드디어 고대하던 상경 준비를 했다. 약간의 무기력함을 안고서.
나의 이런 심리에 공감하는 사람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인기가 너무 많으면 갑자기 짜게 식는 심리랑 비슷하다고 하면 공감이 될까? 아니면, 1등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으니 앞으로 기대할 것도 없다고 한다면 공감이 될까? 누가 공감을 하든 안 하든 아무튼 나는 그런 인간이다.
96점에서 100점이 되는 성취감보다,
4점에서 50점이 되었을 때의 짜릿함이 더 좋다.
이 학생은 4년 뒤 삼성과 엘지를 준비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홍대 교수들이 회사로 취급해주지 않는 스타트업에 입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초기 멤버로 합류한 스타트업이 드디어 6,000억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는데 퇴사를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