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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제니 Nov 29. 2020

13년 전 나의 은밀했던 취미생활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이 주는 힘

베이킹을 다시 시작한 지 오늘로 약 두 달이 됐다.


나는 원래 몰입도가 좋은 편이다. 한 번 꽂히면 잘 파고든다. (그 몰입력으로 입시도 치렀었다.) 하지만 한 번 꽂히기까지가 어렵다. 흥미가 가다가도 꽂히기 전에 금방 질린다. 얼마나 진득하게 뭘 못하냐면, 완주한 드라마가 2009년 꽃보다남자, 2010년 시크릿가든 이후로 없다. 아, 넷플릭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완주에 성공한 멜로가체질도 있구나.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늘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입시제도를 성실히 따라가느라 모든 취미생활이 단위 시간당 공부할 수 있는 양으로 기회비용이 셈해졌기에 더 그랬다. 무언가에 몰입이 가능할 때까지 계산 없이 시간과 정성을 투자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공부 외에 다른 취미 생활은 없었다. 아, 싸이월드에서 페이스북으로 이어지는 소셜 미디어를 정말 즐겁게 했던 기억은 난다. 이마저도 시험이 끝나면 축제 분위기 속에 잠시 활성화를 했다가 한 일주일 후쯤 다시 비활성화를 하는 패턴으로 사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슬픈 학창 시절이지만, 그 시간으로써 성취해낸 것들이 있으므로 나름대로 소중히 생각하기로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남 모르게 가장 열정적으로 소셜 미디어 상에서 소통하던 시기가 있다. 바야흐로 십수 년 전,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다. 당시는 포털 사이의 경쟁에서 네이버가 선두로 치고 나가면서 2003년 정식 런칭된 네이버 블로그 서비스가 인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DIY 열풍이 불기 시작해 가구, 뜨개 등의 취미를 중심으로 블로그 커뮤니티가 꾸려졌고, 커뮤니티 안에서 구성원들은 꽤나 밀도 높게 교류했다.


그중 단연 규모가 컸던 건 홈베이킹 커뮤니티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빵을 참 좋아했는데, 그림을 그리라고 스케치북을 주면 맨날 빵만 그려대서 “쟤는 왜 빵밖에 안 그리냐”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빵에 대한 애정은 신기하게도 빵을 더 많이 먹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 빵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옮겨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의 최종 단계는 그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 영화 감독이 말했던가.) 나는 그렇게 홈베이킹 커뮤니티에 조심스럽게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블로그 커뮤니티에는 서로 알아가는 예절이 있었다. 댓글을 하나 둘 남기다가, 안부게시판에 가서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여러 차례 안부글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근황, 베이킹 관련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그렇게 친해지다 보면 ,“언니 말 놔주세요~”로 이어지고… 그다음 수순은 오프라인 만남이다. '민들레 영토'에서 주로 진행되던 '정모' 내지는 단 둘이 만나 밥을 먹고 카페에 가는 식이다.


온라인에서 친해진 언니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건 사춘기 소녀에게는 꽤 무서운 일이었다. 안전 면에서가 아니라, 자신감 면에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면 어떡하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면 어떡하지? 아직 얼굴도 못 보여줬는데 얼굴을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마치 블라인드 데이트를 나가는 심정으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오프라인 만남은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온라인 상의 교류에는 참 열심히 참여했다. 하루는 2박 3일 부모님과 할머니와 스키장에 갔었다. 그때 눈썰매가 아닌 스키를 처음 탔었다. 생각보다 나는 스키에 소질이 있었고, 첫째 날에 스키 초보 강습으로 시작해서 (1시간 안에 스텝만 알려주는 강습으로 리프트는 타지도 않았다) 독학으로 레인들을 완주하다가 중상급의 초록 레인까지 완수하고는 생애 처음으로 이틀 만에 2킬로가 빠지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단기간에 몸무게가 줄어드는 경험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키는 ‘꽂힘’의 영역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사람들에게 “나는 스키에 소질은 있지만 재밌어하지는 않아”라는 다소 오만한 멘트로 스스로를 소개하게 한 계기로 남았을 뿐.


무튼, 2박 3일 집을 비우면서, 블로그도 함께 비워두고 있다는 초조함이 이어졌다. 리조트 지하에 있던 pc 방에 가서 한 시간을 선불하고는, 밀린 과제 처리하듯 아주 바쁘게 댓글과 안부게시판을 오가며 대댓글을 달았다. 지금 스키장에 놀러 와서 잠시 동안 블로그를 비워야 하니 양해해달라는 마치 유명 맛집 같은 게시글도 남겼다. 과연 몇 명이나 궁금해했을까 싶긴 하지만.


그렇게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커뮤니티였다. 물론 커뮤니티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베이킹 자체에 열정적이어야 했다. 본질이 되는 콘텐츠를 꾸준히 제공해야 새로운 유입과 지속적인 리텐션이 생겨나므로. 나름대로 콘텐츠의 퀄리티도 계속 높여가야 했다. 스탠드 불빛을 조명 삼아, 지금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영자 신문, 바구니 등의 소품을 이용해 빵과 쿠키를 열심히 찍었다.


대략 이런 모양새였다.


블로그 커뮤니티에서 제일 재밌었던 문화는 ‘선물 주고받기’였다. 그야말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절묘한 접점! 블로그를 구경하며 서로의 베이킹 실력을 흠모하던 사람들끼리, “와 맛있겠다” “먹어보고 싶어요” 에서 “그럼 보내줄게요” 로 대화가 옮겨가면서 이루어졌다. 3호 정도 되는 택배 박스에 각자 갖고 있는 진귀한 베이킹 재료들과 방산시장(을지로에 있는 베이킹 재료 및 도구 도매상으로, 당시 베이커들에게 성지로 불렸던 곳)에서 산 이런저런 포장재를, 그리고 제일 예쁜 상자에는 자신이 만든 베이커리를 담아 손편지와 함께 보내주곤 했다.


'택배로 선물을 주고받았는가?'는 서로의 친한 정도의 분기점 같은 것이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한 언니가 있다. ‘삼순이’라는 닉네임의 블로거였는데, 당시 나는 초등학생, 언니는 아마 대학생 정도의 나이로, 가끔 올라오는 예쁘고 상냥한 언니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설렘 같은 걸 줬었다. 어릴 때 학습지 선생님이 좋은 향기가 나고 목소리도 나긋하면 기분 좋게 찌릿찌릿했던 느낌, 그런 비슷한 느낌을 언니에게서 받았던 것 같다. 무튼, 나의 첫 택배는 삼순이 언니에게 받았다. 택배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내 주소를 받아간 후로는, 언니가 베이킹 포스트를 올릴 때마다 내 택배에 저 빵이 담겨오려나, 김칫국을 마시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블로깅으로 친해진 사이는 블로깅으로 보답해야 하는 룰이 있었다. 온 선물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찍어 블로그에 ‘삼순이 언니에게 온 고마운 택배’ 류의 제목과 함께 업로드하면 일련의 선물 주고받기 과정이 마무리된다. 포스트를 올릴 때 관건은 선물 받은 베이커리류를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찍었는지, 그리고 시식평을 과하지 않되, 얼마나 칭찬을 섞어 맛깔나게 했는지였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언니가 보내준 진귀한 포장재 중 일부를 다른 친구한테 선물로 보낸 걸 들킨 거다. 나름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당시 나는 ‘보안 상의 이슈’로 온라인 거래를 전혀 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 재료를 대부분 직접 방산시장에 가서 이고 지고 집으로 와야 했다. 더군다나 포장재들은 주로 몇백 장 단위로 판매되었기에 용돈을 받는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가진 유일한 포장재는 무지 비닐이었던 것이다. 보내줄 수 있는 아이템이 없는 상황에서 언니에게 받은 포장재를 소심하게 2-3장 정도 떼어 다른 친구에게 보냈던 것이 화근이었다. 며칠 후 올라온 그 친구의 선물 후기 포스트를 본 언니는 ‘솔직히 서운하다’는 글을 비밀글로 남겼다.


글을 읽고 어찌나 가슴이 철렁하던지. 댓글로 구구절절하게, 포장재를 전부 보낸 것이 아니며 너무 예뻐서 같이 쓰고 싶은 마음에 두장 정도를 보냈다는 설명을 사과와 함께 달고는 수시로 블로그에 들어가 대댓글이 달렸는지, 마음은 풀렸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오해가 있었고 설명해줘서 고맙다는 댓글로 마무리되었던 기억이다. 이런 작은 오해와 마음 졸임, 화해의 과정까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온라인에서 만난 사이지만 서로에게 꽤나 진심이었던 관계들이었다. 계산하지 않는 공통의 열정으로 묶인, 호감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 아직도 언니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운영하던 당시에도 나의 단짝 친구 한 명만 존재를 알고 있던 비밀스러운 내 블로그는 현재 비공개 처리를 해둔 상태다. 이따금 생각나 들어가 보면, 현재까지 십수 년 전과 같은 닉네임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블로거들이 몇몇 보인다.


택배를 보내보고 싶다고 엄마의 허락을 받기까지 얼마나 긴 설득이 필요했던지. 지금도 언제나 걱정이 앞서는 엄마는 (대부분은 합리적인 걱정이다) 당시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한 낯섦까지 더해져서 온갖 시나리오를 나에게 쏟아내곤 하셨던 것이다. 엄마의 상상이 무색하게 당시 네이버 블로그 홈베이킹 커뮤니티를 이루던 사람들은 정말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착했다. 초등학생이던 내 눈에 그리 보였고, 지금 돌이켜봐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당시 받았던 손편지들은 내 편지 보관함에 빠짐없이 보관되어있다. 몇 장 짜리 손편지들을 읽고 또 읽고 했다. 택배를 보내야 할 때면 부족한 실력과 자금 사정으로 (다시 말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엄마는 툴툴거리면서도 선물 구성, 포장 등을 도와주셨다.


재정적으로든 결정권 면에서든 항상 을의 위치에서 마음 졸이며 한 취미 활동이었지만 그래서 더 간절하고 재미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발굴하여 진득하게, 그리고 뜨겁게 유지한 열정이었다. 타인의 동기부여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열정은, 단순히 ‘그땐 그랬지’의 추억의 모습으로만 남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니 그 시간이 남긴 가장 큰 선물은, 내가 무언가를 진짜 좋아할  어떤 모습이 되는지 알게 된 것이었다.


베이킹을 다시 시작할 때 까지는 망설임의 시간이 길었다. 한창 성장할 시기에 계속해서 장애물에 부딪혔던 기억은 어떠한 종류의 상처를 남겼고,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방어기제를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달간, 원 없이 만들고, 선물하고, 또 만들었다. 밀린 안부글에 댓글을 달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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