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곳에서 스터디
들어오라는 말에 수상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나는 작업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방 안은 다소 어두웠지만 전구색 조명과 갓등이 곳곳에 놓여있어 따뜻한 색감이 돌았다. 가로 4칸, 세로 4칸으로 구성된 책장을 중간쯤 배치했는데, 그녀가 쓰는 것으로 보이는 책상은 책장 뒤에 숨어 있었다. 입구와 4X4 책장 사이에는 손님 응대용으로 보이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쪽에 눈길을 주자, 도도는 앉으라고 권했다. 수상한 기분을 그때쯤 나도 떨쳐냈다. 틀림없이 작업실인 것이다.
도도는 차를 내오겠다고 했는데, 별도의 부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 옆에 놓인 냉장고에서 1.5리터짜리 생수를 꺼내오더니 도도는 커피포트에 부었다. 물이 끓는 동안 나는 두리번 거리며 공간을 눈에 새겼다. 책장에는 빼곡하게 시집과 소설책, 삽화집, 인문학, 역사책이 꽂혀 있었다. 창동에서 글쓰기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는 게 조금씩 믿겨졌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곳은 이전에는 1층 타이어 가게의 사무실로 쓰이던 곳이었다고. 스티커도 그래서였다. 작업실에 달리 이름이 있을 순 없었고, 그래서 굳이 떼야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도도는 커피로 할지, 홍차로 할지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번뜩 차린 나는 “그저 물이면 되는데...”라고 말했다. 커피포트를 든 도도가 눈빛으로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는 힐난을 던지는 듯했다. 도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제풀에 “커피요”라고 정정했다.
탁자에 홍차와 커피가 놓인다. 도도는 자신이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서 극작을 전공했다고 소개했다. 그전에는 서울예대에서 똑같은 전공을 했단다. 문창과에서 하는 듯한 고강도 합평이라는 것도 그래서 아는 것이리라. 나는 그와 같은 고강도 합평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글쓰기에 관해서라면, 나도 대학때 시와 소설 모두 지망했다. 내가 한때 존경하던 시인 교수는 대학원으로 진학해 공부를 더해보는 것을 제안했다. 나는 뿌리쳤다. 그때 나는 아무래도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교수님은 연구실에서 창문을 바라보고 계셨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의 희미한 목소리였다.
나는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었다. 돈을 벌어 어엿한 생활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문학이 인간을 이해하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일에 몰두하는 생활을 거치고 돈 버는 조직에 몸담는 것 또한 인간을 이해하는 한 방편이리라. 그와 같은 자기변호 속에 나는 결국 어정쩡한 태도로 문학의 안쪽과 바깥을 오가며 서성거렸다.
게다가 의심하고 걱정하는 내 태도로는 문학의 절대성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을 뿐더러, 교수에 충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학원이라는 제도가 나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결국 제도의 바깥에서 다시 문학의 안쪽을 두드리고자 스터디를 찾은 것이다.
극작과인 도도는 드라마 각본을 쓴다고 했다. 나는 시나리오라면 전혀 모르는 쪽이었고, 애초에 이곳은 시를 쓰는 모임은 아니니까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했다. 도도는 내게 어떤 장르를 쓰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SF’와 ‘로맨스’를 쓴다고 했다. 독자에게 많이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는 한동안 매주 A4로 1장 분량의 콩트를 써서 서로 합평했다. 문장과 구조를 연습한다는 목적으로 짧은 글부터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나는 정말 로맨스와 SF를 썼고, 도도는 주로 유년기의 방황하는 소녀가 나오는 짧은 콩트를 써서 보여줬다. 즐겁게 했다.
“그런데 프로가 된다는 게 뭐죠? 도도 씨, 역시 등단일까요?”
“이걸 써서 먹고 산다는 거죠.”
“그냥 저는 이 글을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하는 생각예요.”
“우린 서로의 꼼꼼한 독자니까, 꿈을 이루셨네요.”
도도의 좋은 풀이였다. 커피포트로 끓인 홍차가 늘 따뜻했다.
합평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의 당초 생각과 달리, 창동에서 글을 배우거나 합평 스터디에 들겠다는 사람은 좀체 없었다.
2017년 3월쯤 서울의 한 대학 문예창작학과 2학년에 재학중인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가 두 달 뒤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며 사라졌다, 한없이 자유로운 친구였다. 우리 둘은 아쉬워했다.
서울 동북권에 생각보다 수요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수요를 발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이 공간과 스터디에 애착을 가졌다. 아무렴 함께 반년을 꾸려온 모임이었다.
나는 매달 공간 사용료 명목으로 10만 원씩 내고 있었는데, 6월쯤 도도는 더 이상 이 돈을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도도는 더 이상 스터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지친 듯했다. 그 사이 개인적인 사정도 겹쳤다. 부산에 사는 그녀의 노모를 돌보러 내려갈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나는 이 공간을 어떻게 쓸 생각이냐고 했다. 계약은 11월까지였다. 44만 원 월세까지 어떻게 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싶거나 글을 쓰고 싶을 때 들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이 지금과 달리 쓰이는 것도 아닌 셈이었다. 나는 우리 공간을 이전처럼 쓰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임대료는 절반씩, 그 외 운영에 필요한 제반 비용은 월급에서 어떻게든 떼어낼 테니 ‘독립서점’을 운영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홍대도 강남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창동에서. 암호를 타전하는 이에게만 열어줄 세상을 공들여 꾸며보자고 말이다. 그건 애초에 도도가 먼저 스터디를 할 당시에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이곳은 앞으로도 가능성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우리는 좀 더 이 공간의 가능성을 실험해야만 했다.
나는 그녀의 삶이 나침반처럼 그와 같은 실험공간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점은 도도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역시나였다. 도도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흔쾌히 OK했다.
도봉구에는 아직 독립서점이 없다고요. 나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도에게 강조했다. 정말요? 그럼 우리가 1호네요. 도도 역시 의욕을 냈다.
그렇게 닳아버린 직장인과 지친 예술가가 힙겹게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진짜 고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