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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Aug 16. 2019

할머니, 저 이제 호박잎도 잘 먹어요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었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 아침밥, 도시락, 저녁밥은 할머니의 손맛으로 채워졌다. 전라도 남원이 고향이었던 할머니의 요리 솜씨를 그때는 몰랐다. 그저 할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당연한 줄 알았던 철부지의 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매끼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새로운 반찬을 내어주시려고 늘 분주했다. 아파트 공터에 작은 텃밭도 가꾸셨다. 매년 고추와 호박을 자그마하게 일구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갓 따오신 맨질맨질한 고추와 호박을 보며 참 싱그럽다,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 호박부침개 먹고 싶다, 스치듯 했던 혼잣말에, 할머니는 그날 점심 호박부침개를 만드셨다. 경로당에 가셨다가 집에 오신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여보오, 저기 가서 호박 하나 따 오시오. 


“호박이 익었을랑가 모르것네.”


“내 엊그저께 보니 쪼까난 호박 하나 익었네잉.”


“호박잎도 조까 먹지.”


“호박잎이 잡수고 싶은 갑네잉. 호박잎도 따 오시오 그러면.”


“그려, 호박잎도 따 와 볼랑게. 자네가 호박잎 물컹하게 쪄 줄랑가?”


“아이고, 쪄주지 안 쪄줘? 호박잎 물컹하게 쪄서 쌈 싸 먹제.”


저 양반은 꼭 호박잎 물컹하게 쪄서 쌈 싸먹는 것을 좋아혀잉.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미션을 완수하러 나가시자 할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시며 멸치젓갈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코를 틀어막고, 악, 할무니, 이게 무슨 냄새예요? 빽 소리를 질렀다. 맛있는거여, 이따 먹어봐잉. 


할아버지가 갓 따온 두 주먹만 한 호박과 호박잎으로 할머니는 요리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호박을 채 써는 것을 옆에 붙어서 구경하곤 했는데, 할머니의 빠른 칼질 솜씨에 우아, 할무니 진짜 최고! 언제는 할머니가 호박을 채썰기 전에, 호박 써는데 와서 안 보냐잉, 날 부른다. 그러면 나는 또 냉큼 달려가 우아, 할무니 진짜 빨라! 할무니 호박부침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할아버지를 위해 물컹하게 익어가는 호박잎의 구수한 냄새가 초여름의 집안을 후끈 채운다. 그때는 호박잎의 풋냄새도 싫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음식인 호박잎과 멸치액젓 양념장, 그리고 내음식인 노릇노릇 호박부침개가 한 상에 소담하게 올라와 있다. 역시 할머니 호박부침개는 최고다. 부침가루 없이 그저 밀가루로만 만들었어도 고소하고 담백한 우리 할무니 호박부침개.


“할무니, 호박잎 쌈이 맛나요?”


호박부침개를 정신없이 먹으면서 괜히 던져본 질문이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할머니는 나를 위해 호박잎에 밥과 멸치액젓을 얹고서 자그맣게 말아서는 내 입 앞에 불쑥 호박잎 쌈을 내밀었다. 으악, 이게 뭐야, 나 안 먹어요, 안 먹어!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내 입 앞에 호박잎 쌈을 대기중이다. 한 번만 먹어봐, 지인짜 맛나당게! 아, 할무니, 나 진짜 먹기 싫어요! 앗따, 한 번만 먹어 보랑게! 할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꿍얼꿍얼 거의 울먹이다시피 입을 벌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 입안에 쌈을 쑤욱 밀어 넣으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호박잎 쌈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맛평가를 하기 위해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오물오물 쌈을 씹어 삼켰다. 


그런데 웬걸, 호박잎 쌈이 생각보다 맛있다. 할머니의 시식 강요에 대한 불만으로 아주 혹평을 계획했지만 아무래도 거짓을 말할 수는 없어서, 왠지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멋쩍은 마음으로, 맛은 있네요. 것 봐, 맛있당게! 할머니는 그 틈으로 얼른 호박잎 쌈을 내 입에 하나 쑤욱 더 밀어 넣으셨다. 할무니는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은 늘 그렇게 쑤욱 밀어 넣으신다. 아이스크림 한 입만, 그러면 입으로 쑤욱 밀어 넣어 절반은 먹게 만드는 것이다.


그 뒤로 자취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미국에 오면서 호박잎 쌈을 먹을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올 봄, 나는 불현듯 우리 가족 저녁 메뉴로 호박잎 쌈을 제안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을 때마다 웬만하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함께 즐겨주는 우리 가족인데, 그날은 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빠마저도 시큰둥한 얼굴이다. 그래도 나는 기어코 호박잎을 찌고 양념장을 만들었다. 호박잎 쌈에 관심 없는 동생을 위해 호박잎 하나하나 밥을 싸고 양념을 올려 입으로 쑤욱 밀어 넣었다. 동생은 맛있네? 말과 함께 쌈을 열심히 먹는다. 마음속에 떠오른 회심의 미소.


한 십 년 만에 먹는 호박잎 쌈인데, 어쩐지 평소에도 늘 먹던 음식처럼 거리낌이 없고 꿀꺽꿀꺽 잘도 넘어간다. 푹 쪄진 호박잎이 찢어질 듯 말듯하여 조심스레 밥을 싸고 명란젓, 꼴뚜기젓, 쌈장, 종류별로 준비한 양념장을 조심스레 올렸다. 반찬도 없이 호박잎과 양념장으로 4인분 밥을 동생과 둘이서 해치웠다. 


다음 날에는 할머니 병문안을 가는 길에 호박잎을 쪄서 가져갔다. 할무니, 맛나죠? 아이고, 맛나다잉. 뭐시가 이렇게 맛나다냐잉. 그죠! 저도 이제 호박잎 잘 먹어요, 할무니. 할머니는 물컹한 호박잎을 너무나 반가워하며 그 날 밥 한 공기를 싹 비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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