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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Oct 29. 2020

시국을 뚫고 간 미국 섬여행에서 마주한 인생, 굴타코

행복하게 살아야지, 깨닫고 살아야 해요?
죽을 때까지 깨달음을 구하다가 깨닫고 그냥 죽어야 해요?
그저 깨닫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어요.
단박에 깨닫고 평생 즐겁게 살아야 해요.

                                                        -법륜스님 강연 말씀 中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의미가 있는 삶인가. 나란 존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나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자주 던진다. 이런 질문들이 몰고 온 결과들은 대부분 후회, 좌절, 그리고 답답함.


솔직히 말하자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들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 모르면서도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타고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울 때마다 스스로 고문을 하듯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던 중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마주친 법륜스님의 말씀.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나에게 정말 필요한 이야기구나.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될 일이구나.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좀체 삶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삶과 존재의 질문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도 없다. 뭐 대충 이런 것이다. 아니, 나는 도대체 뭘 하며 살고 있나. 이 나이 먹도록 모아놓은 돈도 없고. 친구들은 자식들 키우며 돈도 그렇게 잘 버는데 나는 딩크족에다가 시간도 남아도는데 일도 열심히 안 하고 시간만 헛되이 보내는구나. 한다, 한다 하고 안 하는 일 들은 어떻게 되어가는가. 하든 안 하든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이긴 하다. 아니, 그래도 내가 관심이 있을 내 인생일 텐데. 이 와중에도 저녁에 보고 싶은 미드를 검색하고 있다니 정말 답 없는 인생이로구나. 인생의 낙이라고는 저녁 시간 맛있는 안주와 함께 미드보는 게 다인 인생이어도 되는 것인가.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체화하지 못한 것들은 꼭 탈이 나서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게 만든다.


사실 애런은 몇 달 전부터 섬 여행 계획을 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메릴랜드로 이사 온 뒤, 근 3년간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달려온 애런이다. 나는 1년에 한 번은 꼭 한국을 찾아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내 시간을 갖고 활력을 찾았었다. 애런은 휴가를 떠날 자격이 있었지만,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나는 조심스럽게, 스읍- 이번 여행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호텔과 렌터카 모두 안전할까. 음식도 그렇고 말이야. 다음에 가는 건 어떨까. 그러나 나보다 더 조심성이 많은 애런이 호텔과 렌터카 청결을 체크했다며, 우리가 사회적 거리만 잘 유지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또 애런은 자기 생일 주간임을 특히 강조했다. 올해는 한국도 못 갔는데. 나를 설득하기란 쉬웠고 우리는 이렇게 섬여행을 결정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 곳은 애서티크섬과 친커티그섬이다.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 걸쳐 있는 그 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차로 3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우리는 드라이브 내내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킬킬대기도 하고, 심각한 정치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을 보며 옥수수에 대한 취향을 나눴다. 나는 한국의 찰옥수수가 미국의 노오란 옥수수와 어떻게 다른지 아주 세세하기 설명하며 한국을 떠올렸고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섬은 참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닷가 여행지 부산을 떠올렸고, 애런은 아버지가 계시는 테하추피라는 평화로운 마을을 떠올렸다. 호텔 내 마스크는 필수고, 마스크 없이 돌아다닐 시에는 강제 퇴거당할 수 있다는 경고문이 엘리베이터마다 붙어 있었다. 조식은 제공됐지만, 별도 포장되어 룸으로 가져가서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야외에 있는 수영장에서 조식을 먹기도 했는데, 수영장 바로 앞에 선착장이 있어서 빼곡한 배를 구경하면서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호텔 수영장 앞 선착장


섬 내 여행객들은 정말 적었다. 그 섬이 유명한 휴양지라는 것을 가만하면 여행객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팬더믹 상황도 있었고, 날씨가 정말 좋지 않았다. 우리가 여행하는 3박 4일 내내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차가운 바람이 거셌다. 풍랑주의보가 발효되기도 했다.


문을 연 식당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실내 식사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포장을 거부하는 곳도 있었고, 배달이 안 되는 곳도 많았다. 섬에 도착한 당일 저녁은 혹시 몰라 준비해간 가져간 컵라면으로 때웠고, 그다음 날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나온 머핀, 그 날 오후는 또 컵라면을 먹었다. 후식으로 오징어땅콩을 먹었는데, 섬에 와서 첫 해물이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했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먹은 컵라면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이 바다 너머에 아프리카가 있다니! 그래도 생애 첫 대서양을 앞에 두고 찬바람을 맞아가며 먹는 컵라면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고, 애런에게 나는, 이미 이번 여행에서의 모든 것을 이루었다. 이후부터의 여행은 뭐가 되어도 보너스이니 손해 볼 게 없어, 라고 말했다. 우리는 섬을 걷고 탐험하고,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식당을 탐색하고, 춥다고 불평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여행 셋째 날에는 우리 숙소와 좀 떨어진 곳의 타코 식당을 발견했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로컬맛집 포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이 집이다!


로컬 맛집에서 마주한 굴타코와 피시타코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식당 대표 메뉴인 피시타코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리고 새우타코와 굴타코가 있었다. 굴, 굴타코?! 메뉴부터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린 굴타코. 나는 굴타코와 피시타코를 주문했다. 피시타코도 맛있었지만, 튀긴 굴에 가벼운 양념을 해 굴의 풍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굴타코가 정말 맛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분이 추천해준 멕시코 에일맥주와 최고의 궁합이었다.


어느 정도로 맛있었냐면, 그날 점심과 저녁을 모두 그 타코 식당에서 해결했을 정도다. 저녁에 방문했을 때는 굴타코 2개를 주문하고, 2개를 다 해치운 후 다시 1개를 더 주문해서 먹었다. 애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리얼리? 라고 물었다. 그래, 리얼리다. 미력하나마 붙잡고 있었던 이성의 끈을 그리 쉽게 놓았다. 인생 굴타코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대뜸 애런에게, 면허증을 따야겠다고 말했다. 애런이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운전에 대한 열망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면허증을 따보라는 애런에게 에이, 무슨 운전이야, 한국에서도 차 없이 잘만 살았는 걸 뭐. 여기도 지하철 잘 돼 있어서 어디 다니는 데 지장 없어. 차는 또 무서워. 내가 잘해도 남이 잘못하면 사고 나는 거잖아. 늘 이렇게 말했다.


면허증을 따야겠다는 내 말에 내가 놀라기도 했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 이유를 내 목소리를 들으며 깨달았을 정도다.


요즘 우리 삶이 답답했잖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요즘 다 힘들잖아, 그치?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 내가 미국에 살면서 제일 힘들어했던 게 뭔지 알지? 단절이잖아. 지금 팬더믹 상황이 아니었어도, 사람과 장소에 대한 단절이 늘 나를 좀먹었던 것 같아.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좀 울었다. 나는 운전 자체에 대한 욕망보다는, 그 행위에서는 오는 독립적인 행동력과 결단력, 그리고 확장이 필요할 때라고 느꼈다. 또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일에 게을러지지 말자고 결심했다.



여행하는 동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을 즐겼고, 기분에 나를 맡겼다. 단박에 깨닫고 평생 즐거워야 한다는 법륜스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었을까. 불현듯,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내 안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난데없이 돌멩이가 떨어지는 파문의 호수라서, 내 모든 삶이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단박의 깨달음과 평생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깨달음으로 삶의 동력을 얻은 것에 아주 큰 기쁨을 느꼈다. 가장 제약이 많았던 여행이었지만, 내 모든 여행을 통틀어 가장 의미 있었던 여행이 됐다.


삶이라는 것이 이처럼 사소한 결단에서부터 바뀌는 것이었던가. 여행이란 것이 이토록 값진 것이었던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한 달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에 활력을 안고 살고 있다. 이쯤 되니, 드는 생각. 인생의 낙이라고는 저녁 시간 맛있는 안주와 함께 미드보는 게 다인 인생이어도 꽤 만족스럽지 않은가. 먹는 것에 가히 열정이 있어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과감하면서도 신속하고, 새로운 이야기에 호기심을 잃지 않는 고품격 먹보의 삶이다.


시국을 뚫고 간 이번 섬여행에서 나는 인생을 마주하고, 인생 굴타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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