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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un 21. 2021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루리, 긴긴밤

"기나긴 밤"이 기다림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밤이라면, "긴긴밤"은 두렵고 외로움이 밀려오는 밤이다. 각자가 바라는 간절한 무언가가 있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막막하다. 긴긴밤을 보내고 또 보내다 보면 분명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할 터이지만, 긴긴밤을 보내는 거 자체가 도전이다.


루리의 <긴긴밤>은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어린이 문학이지만 어른이 더 많이 읽는 책이기도 하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가 있다. 코끼리로 살 수도 있었지만 코뿔소가 되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훌륭한 코뿔소 아내를 만나고, 딸도 생겨 단란한 가족을 이루지만 인간들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는다. 코뿔소는 동물원에 가게 되고 동물원에서 그는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흰 바위 코뿔소, 노든으로 불린다. 노든은 그곳에서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코끼리 무리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코끼리는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된다.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펭귄을 위해 다른 펭귄이 오른쪽에 서서 중심이 대고 지탱해 준다. 동물원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코뿔소와 펭귄이 함께 있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들은 만났고 서로 의지한다. 코뿔소는 펭귄의 알을 대신 품어주고, 한 존재를 탄생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책 표지에 보면 코뿔소는 뿔이 없다. 코뿔소가 뿔이 없다면, 언뜻 보면 코뿔소인지 하마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인간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한 가족을 파멸시켰다. 노든은 혼자 남겨지고 인간에게 언제 가는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코뿔소 앙가부는 노든에게 좋은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앙가부는 노든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함께 계획을 세운다. 노든이 다리가 아파 치료를 받으러 간 어느 밤에 인간들이 앙가부의 뿔을 잘라갔고, 앙가부는 뿔을 잃은 채 죽어 있다. 그렇게 노든은 또 혼자 남는다.


전쟁으로 붕괴된 동물원에서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가 만난다. 그들에게 슬퍼한 시간이 없다. 긴긴밤을 넘어 살아남아야 한다. 하루하루가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를 피해야 한다. 노든이 만약 코끼리 고아원에서 남아 훌륭한 코끼리로 살아갔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든은 후회하지 않는다. 훌륭한 코뿔소, 자신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와 딸을 만났고, 코뿔소 앙가부, 펭귄 치코를 만났다. 그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고, 노든은 다른 존재가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가 된다.


이름을 가져서 좋을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있으니까


펭귄 '나'는 노든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다. 노든의 말처럼 이름이 꼭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동물에게 이름이 있다는 건 사람과의 접촉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노든은 동물원에 와서 이름이 생겼다. 동물에게 이름이 있다는 건 사람에게 길들여진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인간은 한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이름을 붙였지만, 그거 자체가 인간적인 사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긴긴밤>의 이야기는 동물의 이야기이도, 우리의 이야기기도 하다. 우리는 삶의 터전에서 크고 작은 모험을 하고 있다. 그 모험이 때론 두렵기도 외롭기도 하고 가끔은 맞이하는 밤이 끝이 없을 것 같은 긴긴밤일 수도 있다. 긴긴밤 그런 날 하늘을 보자. 별처럼 반짝이는 추억과 소중한 인연들을 생각하며 또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 그리고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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