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쟁이요기 Feb 11. 2019

마음껏 힘겨워하기 위한 조건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 생각의 근육을 수련하다  

[생각 숨 창간호]


마음껏 힘겨워하기 위한 조건


김성아(생각스튜디오숨 대표)


생각스튜디오숨이 오픈했습니다!

요가스튜디오숨과는 친구사이죠. 더부살이를 하는.

요가는 몸의 쓰임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무엇을 위한 몸의 쓰임일까요?

하루하루 버거운 이 세상에서 졸꾸와 존버 정신이 각광받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졸라 꾸준히, 존나게 버텨야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졸꾸와 존버를 해야만 하는 건가요?

요가 수련을 하며 매일 저에게 묻는 질문.

매트 위에서 고통을 인내하며 하나의 아사나를 완성해야만 이유는 뭘까? 편하게 하면 안 돼? 그냥 즐기면 안 돼?

저에게 글쓰기는, 요가는

이 물음에 해답을 찾기 위한 몸 부림입니다.

생각스튜디오숨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읽는 생각의 근육을 수련합니다.

다양한 매체인 웹툰, 책, 만화, 영화, 잡지, 드라마 등등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 보려 합니다.

들여다 본 세상을 머릿 속에 담아두지 않고

글쓰기라는 작은 움직임으로 바꿔보려 합니다.

생각스튜디오숨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히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다움,

반짝반짝 빛나는 나다움을 찾는 것입니다.

글쓰기라는 몸 부림을 통해 생각의 근육을 수련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아주 나답게 버텨내보자. 요런 아주 거창한 수련이라고 할까요?

버텨내는 데 익숙해지면 변화가 시작되기도 하니!

나와 세상의 변화는 덤으로!

자, 그럼 첫 수련을 즐겁게 시작해보죠! 생각의 근육을 이완시키기!


요즘은 거의 보지 않지만 예전 웹툰과 웹소설에 빠져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강풀의 <26년>(2006), 김우준의 <IGO>(2011)일 것 같네요. 강풀의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을 했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를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우준의 작품은 벽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청년들의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림쟁이로 살고 싶은 청년들이 어떻게 부모와 갈등하는지, 어떻게 생계로 고민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희망하는지를 다루는 이야기이죠.

<IGO>에 포창마차를 운영하는 한 아저씨가 나옵니다. 아저씨는 꼰대라는 공식이 떠오르는 요즘이지만 콧수염이 멋진 이 이저씨! 적어도 꼰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술이 고픈 청년들에게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선물할 줄 아는 센스쟁이입니다.

술에 잔뜩 취한 청년들에게 콧수염 아저씨가 나직이 이야기합니다.

“위태한 도전이냐, 적당한 안주냐중에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지는 개인에 따라 다른 거니까,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서로를 너무 물어뜯고 그러지마.

다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네버랜드에서만 살려고 하는 피터팬이 되어서는 안 되겠고,

벌써부터 삶의 목표가 무작정 장수인 것마냥 사는 것도 유쾌하지만은 않을 거야.

지금은 삶의 목표라든가 살아가는 이유, 존재의 이유같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표가 많아 한참 허우적대고 발버둥칠 때이지만,

다들 보면 대부분 서른다섯쯤 넘어가면 그럭저럭 이유들을, 목표들을 찾아가더라고.

일전에도 말했지만

괜찮아. 마음껏 힘겨워해.”

금방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았던 뜨거운 순간들이 지나고 우리는 현실 앞에 마주섰습니다. 현실은 참 변화가 더딥니다. 현실은 참 벽이 많죠?

<26년>,  <IGO>가 던지는 물음에 하나하나 함께 고민하며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으니 함께! 괜찮죠?


“엠마누엘 토드 씨는 금융주도의 글로벌리즘을 평가하며 “사회적인 모든 속박에서 ‘개인을 해방하기’를 바라며 화폐와 그 화폐를 모으는 일을 숭앙하고, 그 속에서 안전을 추구하며 두려워서 벌벌 떠는 소인배를 만드는데 성공했을 뿐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이 ‘소인배’의 얼굴을 앞면에서 보면 ‘맴머니즘’(배금주의)이고, 뒷면에서 보면 ‘허무주의’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토드 씨에 따르면 양쪽 모두 금전을 모든 척도로 삼고 다른 가치기준을 지니지 않는 ‘가치공위시대’의 산물이며, 극과 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근대문명이 거의 필연적으로 낳은 ‘쌍둥이’입니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이 글에서 현대문명 속에 깃든 시대정신으로 비관주의와 허무주의라는 쌍둥이를 꼽습니다. 그 쌍둥이는 화폐를 숭앙하는 인간을 만들었죠. 인간에게 화폐 이외에 삶의 가치기준이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가치공위시대’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곳 맞나요?   


 “가치관의 ‘공위’라고 하면, 일찍이 시몬느 베유가 “20세기 전반의 본질적인 특성은 가치 개념이 희박해지고, 아니 대부분 소실된 점”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년 전 발레리가 지적했듯이 특히 선과 관계된 말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덕, 고귀함, 명예, 성실함, 관대함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거나 위선적인 뜻을 지니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은 이미 인간의 특성을 정당하게 찬탄하는데 아무런 수단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가치공위시대’에서 선, 정의는 코웃음을 치게 하는 단어일 뿐입니다. 이전이면 만화, 영화, 책에서 볼 법한 사건이 현실에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선이라뇨? 정의라뇨?


<26년>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6년간 왜 현실은 바뀌지 않았을까 저는 ‘가치공위시대’라는 개념에 주목했습니다. 과연 ‘그 사람’ 혼자 지금까지의 26년을 만들었을까요? 권력이라는 큰 이름 아래 있는 한 명 한 명의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의 마음에 깃든 철학의 부재가 지금까지의 부끄러운 현재를 만든 것은 아닐까요?   

<26년>은 다양한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살아남은 자, 살아가야 할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가치공위’의 시대를 끝내고 다시 또 다시 끊임없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철학을 공유하는 것-꿈을 꾸는 것-말이죠. 정확히는 선의 가치를 함께 꿈꿔보는 것입니다.


"현실에 몸을 두고, 굳이 고난에 도전하며 부단한 정신투쟁이라는 용광로에서 자기를 철저히 단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곳에 ‘선’을 성취하는 곧은 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마르셀이 말했듯이 “상황이라는 특수성과 법이라는 보편성 사이에는 늘 반드시 긴장이 존재하고” “이런 긴장이 바로 가치를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부단한 정신투쟁의 용광로’와 ‘긴장’은 동의어라고 해도 좋습니다. (중략)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런 ‘부단한 정신투쟁의 용광로’가 지닌 실상을 ‘역사적 삶’으로서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절대적인 역사결정론을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삶이, 따라서 역사적 삶까지도 순수한 순간들로 구성되며, 그 한순간 한순간은 이전의 순간과 무관하기에, 현실은 매 순간마다 망설이고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다양한 가능성 중에 어떤 것으로 결정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 철학적인 망설임이 모든 삶에 분명한 불안과 전율을 부여한다.”


정해진 역사는 없습니다. 정해진 결과는 없습니다. 매 순간 망설이며 고민하는 삶 속의 긴장.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부단한 정신 투쟁을 거듭하는 것. 바로 이것은 끊임없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요? 무한한 희망을 품고.


"’강한 마음’은 ‘지금 이 곳’ ‘지금 이 순간’에서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기 사명을 관철하는 힘입니다. (중략) 중요한 점은 ‘문답무용’이라는 폭력의 유혹에 저항하며 마지막까지 ‘철학적 망설임’ ‘긴장’ ‘부단한 정신투쟁의 용광로’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곳에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단련의 장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디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전제가 ‘타자’라는 존재입니다. 즉 참을성있게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좋든 싫든 부각되는 문제는 바로 ‘타자’와 마주보며 대화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르테가가 ‘타자’와 공존하는 일이 ‘야만’과 결별하는 ‘문명’의 절대요건이라고 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꿈을 꾸는 것만으로 괜찮을까요? 이케다 다이사쿠는 같은 글에서 타자를 언급합니다. 정확히는 타자와 마주보며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적인 망설임’과 ‘타자와 마주보며 대화하는 일’ ‘철학적인 망설임’은 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은 나만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곳이 아니죠.

여기서 타자와의 대화가 중요해집니다.

<IGO>의 콧수염 아저씨의 조언 그대로

철학적인 망설임이란 물음표를 갖고 마음껏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있는 가능성을 찾기 위해! 자신만의 사명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넘어지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겨움은 외톨이처럼 혼자가 돼 외로운 힘겨움이 되어선 안 됩니다. 함께 힘겨워 할 사람을 찾고 만나며 대화해야 합니다. 함께 꿈을 꿔야 합니다.

여기서 <IGO>는 <26년>을 만나야만 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이어져있듯이 우리는 수많은 타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자는 물론 역사를 포함하겠죠. 그들을 바로 보고 대화하지 않는 ‘힘겨움’이라면 결국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가치로 삼는 또 다른 ‘가치공위’일 뿐입니다.

‘현실에 몸을 두고 굳이 고난에 도전하며 타자와 대화하는 것’을 왜 해야 할까?

왜 그런 철학적 꿈꾸기를 해야 할까?

이케다 다이사쿠는 또 다른 책에서 말합니다.

그런 '그대'가 '세계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자신의 행복한 결말을 축하하기 위해 역사가 실현된 이후 비상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사건에 적용되는 주체적 명제, 욕망, 실천이다."


들뢰즈가, 헤겔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끊임없이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 굉장한 사명을 잊고

피터팬을 꿈꾸고 장수를 꿈꾸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요?


"자유를 바란다면 스스로 일어나 싸워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승리는 자기 손으로 쟁취하는 것임을 모르는가"


영국시인 바이런은 외쳤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철학적인 망설임과 타자와의 대화에서 시작된다는 것.

지금부터 함께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팽팽하게 긴장된 생각의 근육부터 이완하고

자 누군가와도 좋으니 대화를 시작합시다! 배웁시다! 그리고 함께 꿈을 꿉시다!

세계를 바꾸는 그대의 싸움을 응원하겠습니다.

저 또한 “마음껏 힘겨워”하며.

작가의 이전글 지금 여기서 시작하기. 마디와 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