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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min Nov 13. 2017

우문현답

실습 일기

지난 글에서 외래 소감을 쓰면서, 외래에서의 교수님께서 어떤 말들을 했는지, 그중 제일 명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의학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는 경우와 달리 인생에 대해 조언을 해 주는 모습들이 기억에 남았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정신과 외래였다. 정확히 말하면 소아정신과였다. 소아정신과에서는 부모(보호자)와 소아 모두에게 진료를 하기 때문에 참관이 복잡하다. 부모는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의사에게 왔지만,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소아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도 존재한다.


게임을 많이 해요.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 부족 행동 과다 장애)를 진단받은 환아가 부모와 내원했다. 잘 지내기는 하나, 주 호소는 아이가 게임을 많이 한다였고, 부모는 그에 이어서 예전에 ADHD를 진단받은 적이 있어서 게임에 중독이 더 쉽지 않냐는 물음을 제기했다. 교수님께서는 부모의 말을 듣고, 환아에게 게임 때문에 숙제를 못하진 않니,라고 물으셨다. 환아는 다 한다고 하였고, 부모님 역시 밤에 늦게 잘 때도 있지만 숙제는 다 하고 잔다고 답하였다. 여기서 교수님의 현답이 이어졌다.


게임은 원래 재밌어요.


재밌으라고 만든 거잖아요. 부모님도 해보세요. 재밌어요. 아시잖아요. 아, 맞다, 게임은 재밌었지, 나도 해봤지만 정말 재밌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까지도 재밌는 게 게임이었다. 부모님은 순간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교수님을 보았지만, 교수님은 말씀을 그치지 않았다. 숙제를 다 하고 잔다니 괜찮아요. 아이가 게임 때문에 힘들어지면 스스로 게임 양을 조절할 겁니다. 그냥 두세요. 보호자 두 명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말씀을 거부할 논리가 없었다.


행동을 그 사람의 병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논리는 잘못되었다.


그 가족이 나간 이후 교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다. ADHD 때문에 게임 중독 의심이라고 보는 논리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넘겨짚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추후에 그 말씀을 곱씹어 보니, 현대 정신과학에서 말하는 내용과 연관성이 깊었다. 정신과학에서 치료해야 할 질환은 사회적, 직업적으로 문제가 있어야 하는데, 환아는 숙제를 다 하고 잔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게임은 원래 재밌고, 그 나이 때라면 누구나 즐겁게 즐길 매체이다. ADHD와 게임이 결합하여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면 문제가 되지만, 환아가 그런 행동들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환아의 ADHD 때문에 게임 중독으로 의심된다는 보호자의 추리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말씀들이 제일 명언으로 느껴진 이유는 제일 충격적이었고, 편견을 깰 수 있어서였다. 이쯤 공부했으면 알아야 할 건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고 그릇된 편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이었지만 보호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갈 뻔했고, 교수님의 '게임을 많이 해요', 'ADHD에 진단받아서', '게임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라는 절들을 구분하는 과정으로 고정관념을 타파할 수 있었다. 의사라면 환자의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고 언제나 하나하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을 배우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의과대학에서의 학생들 역시 게임이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긴 하지만, 과제를 제시간에 맞춰서 내는 경우가 빈번하다. 게임 때문에 다음 날 쪽지시험 공부를 덜 했다면, 아 저런, 이라고 생각하고 밤을 새워서 준비를 해 간다. 그렇게 다음 시험 때에는 게임을 조금 덜 하거나, 미리 공부를 하는 식으로(물론 의대 공부에는 끝이 없어서 게임을 하고 공부를 힘들게 하게 되지만) feedback을 받는다. 교수님은 이 행동들을 짧은 시간 내에 보호자에게 설명해 주었고, 그들이 이해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환아의 행동이 바뀌고서 이해할 것이다.


그래. 글을 쓰는 것도 좋아서 하는 거지, 누가 쓰라고, 쓰지 말라고 해서 쓰는 게 아니다. 아마 글을 쓰는 걸로 시간이 부족해지면 스스로 피드백을 받아 주기를 조절하지 않을까. 정상적인 사람에서는 이런 과정이 존재하니 잠깐 잘못된 생각을 해도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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