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와 과정 미술의 영화적 활용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잊고 있었거나 나와 거리가 멀다 생각하는 것을 가까이 보여줘 생각과 마음을 준비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불행과 슬픔은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 죽음, 굶주림, 이웃들의 조롱과 같은 문제들부터 개인의 지평 넘어 있던 알 수 없는 문제들까지 보여준다. 무겁고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색채 영화가 적합할 것 같지만 작가주의 감독들이 선호하는 것은 흑백 필름이다. 색채 영화의 시작인 월트 디즈니의 <숲 속의 아침, 1935년>이 제작된 지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흑백영화는 제작되고 있다. 감각적인 영상을 원하는 관객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색채 영화의 시대임에도 흑백영화는 여전히 작가주의 감독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벨라 타르 감독의 2010년작 "토리노의 말"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해주는 영화다.
"토리노의 말"은 마부와 그의 딸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들의 처지에 깊이 빠져들 필요는 없다. 그들의 문제는 이미 100여 년 전에 끝난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과 너무 멀어져서는 안 된다. 비극적 현실은 우리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벨라 타르 감독이 제시하는 것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현재의 문제들을 우리가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시선이 정확하고 세심한지 환기시키는 작업이다. 우리 시대의 무엇을 보고 있는가?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영화는 마부와 그의 딸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소멸에 관한 6일간의 기록이다. 영상과 소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현장의 소리가 아니라 효과음이다. 영상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소리도 의미 전달의 한 방식이다. 비극적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색을 빼내고 소리에 인상주의적 기법을 넣었다. 마치 오노레 도미에의 트랑스노냉 거리 학살의 참혹함에 음향효과를 넣은 듯하다. 영화는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관객이 영화적 현실에 접근하게 하면서 관객을 시대의 목격자가 되게 한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 프리드리히 니체는 문밖으로 나선다. 산책하거나 우편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마부 이름이 뭐였더라? 주세페, 카를로, 에토레? 하여간 마부는 참다못해 채찍을 휘두르고 만다. 니체는 인파로 다가가서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의 잔혹한 행동을 말리려 한다. 건장한 체구의 니체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흐느낀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워 있다가 비로소 몇 마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0년 동안 그는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얌전하게 정신 나간 상태로 누워 있는다. 그 토리노의 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니체의 일화에 관한 내레이션으로 영화 "토리노의 말"은 "낙타에서 사자로, 마침내 아이로 되어라"라 말했던 니체의 정신 변화 3단계를 주제로 삼고 있음을 알리며 시작된다. 토리노라는 지역은 마차의 역할을 대체한 자동차를 생산하는 피아트사의 생산 공장이 있는 곳이며, 또한 말의 상징을 사용하는 페라리 자동차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토리노를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마부와 마차의 기능을 자동차가 대체할 것이란 암울한 미래 제시에 적합하며, 말과 마부의 동시 퇴장에 말 만을 보호한 니체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커 보이게 만든다. 니체가 간과한 노동자 마부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본향당에는 마을과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세 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원본은 제주 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마을에는 복사본이 걸려있다) 중앙에는 남신인 나주목사와 우측에는 그의 부인 궁전요왕대부가, 좌측에는 중의대사가 모셔져 있다. 썩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제주인들이 미적 감각이 뒤처져서가 아니라 이렇게 그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 신앙의 특징인 자연(새)과 인간의 결합된 모습이다. 신들의 신체는 인간의 관능미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연과 연결 가능한 인간의 도덕성을 담는 그릇과 같은 상징이어야 했다. 제주 신의 재미난 점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처럼 인간의 부도덕함까지 담고 있다.
강원도 출신의 중의대사(농지가 적은 강원도와 제주의 지역성이 같다)가 마을 신으로 된 사연은 이렇다. 한라산 영기를 구하러 왔다가 배고픔에 마을 김첨지 환갑잔치에서 돼지고기 국수를 얻어먹었다. 고기를 먹게 된 중의대사는 금기를 어겨 다시 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마을 신이 되기를 자청한다. 궁정요왕대부는 중의대사가 부정한 몸을 갖고 있기에 자신과 떨어진 남당 모퉁이에 좌정해 신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제주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의 대상이었던 돼지고기는 생존을 위해서 먹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중의대사의 몸에 부도덕함을 안치해 마을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배고픔에서 인간을 구원한 신 본연의 역할을 한 것이다.
긴 수염은 장수의 상징이다. 제주에서 장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에게 올리는 제주의 동향에는 기아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소의 내용이 많다. 농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땅과 마실 물의 부족, 어업량의 감소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고대 신앙에서의 창조의 신인 마고할미의 변형된 신인 요왕대부의 몸은 오징어나 문어 혹은 해양 식물의 몸을 하고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면 남신인 나주목사의 몸은 새의 몸으로 농경생활과 결합되어 있다. 농경신이자 남신인 나주목사는 중의대사가 신으로 되면서 인간의 몸과 같아진다. 삶의 시작이 인간 몸의 노동력에서 출발하는 농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창조의 신인 여신보다 남신이 더 높은 지위에 서게 되고 인간의 몸을 하게 된 이유다. 해양과 농경생활이 중심이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어야 하는 목축 식생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중의대사가 신이 된 것이다.
신에 관한 인식의 흐름이 제주와 비슷한 곳이 그리스와 로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를 받아들였던 그리스는 그들보다 인간 중심적인 인식을 가져야 했다. 자연과의 조화가 실제 삶의 균형과 같이 생각되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신은 자연과 인간의 결합된 형태다. 하지만 그리스의 현실에서 그들 삶을 지탱해 준 것은 노동력과 군사력을 제공해 주었던 남성의 몸이었다.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주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신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그리스에서는 동물과 인간이 결합된 반인반신들은 적으로 묘사되거나 인간과 영웅을 괴롭히는 괴물로 추락한다.
중세 기독교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이 부여한 도덕성을 담아야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디오니소스적 열정과 격정을 부활시켰다. 이성이 다시 디오니소스를 추방하자 인간의 몸은 이념에서 해방된 듯했다. 신적인 신성함, 종교적 도덕성, 정치 이념까지 무엇이든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몸은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기계에 담기는 도구가 되었다. 영혼의 해방만에만 관심을 기울인 결과 인간의 몸은 자연에 종속적인 상태에서 기계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이다. 어쨌거나 감독은 자연에 종속적이었던 몸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지금이 좀 살기 편한 것은 아닌가?라는 관객의 의문에 장작을 패는 장면에서 인간의 몸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영혼이 해방을 얻었는가. 니체에게 있어서 몸은 어떠한 정신도 담아낼 것 같았겠지만 인간 육체에 담길 영혼의 기능과 용도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정해지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의 몸은 거창한 신이나 이념이 아닌 삶의 것들인 감자나 물을 재창조해야 하는 기능이 우선적이다. 그릇들이 창조되면서 쓰임이라는 기능에 의해 태어나듯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니체가 간과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누군가에게 정신의 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과 같이 정해진 불가능한 먼 이상향의 이야기일 수 있다.
아이처럼 운명의 수레바퀴를 스스로 굴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영화에서 수레바퀴는 창조성이 아니라 소멸에 대한 도피로 그려지고 있다. 행위와 생각의 자기 개시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육아, 맛집, 여행지, 직장생활, 제품의 구매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경험에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백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취향이 자신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장자의 천도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제환공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던 윤편이 제환공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 제환공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하자 윤편은 그것은 성인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수레바퀴 깎는 기술을 전하려 했지만 몸의 경험과 무의식에서 나오는 손에서 펼쳐지는 미묘한 반응은 자신의 손에서 펼쳐질 뿐 말로 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들들에게 가르치려던 말처럼 성인의 말은 그가 말하는 당시에는 소용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찌꺼기 일 뿐이라는 윤편의 말처럼, 마부가 말을 부리는 온갖 장비들을 수레에 잔뜩 실어 딸에게 끌게 한다고 해서 딸이 마부와 같이 능숙한 마부가 될 수 없다. 그녀는 단지 말에게 먹이를 먹일 줄 아는 정도일 뿐이다. 니체의 정신 변화에 관하 말은 시대성과 현실성을 비껴간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짐을 나르는 마부의 운명의 한계에서 살아온 그녀가 사자가 되고 아이가 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어 보인다.
니체의 시선이 낭만주의적 시선이었다면 벨라 타르의 시선은 낭만주의를 비판한 인상주의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시선이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본 누군가가 고흐에게 좀 더 화려한 색으로 칠할 것을 권유했다. 고흐가 대답 하기를 이것이 농부의 색채이며 그들의 시선과 같은 높이에서 그들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토리노의 말"은 고흐의 시선과 높이가 같으면서 미래의 어둠을 암시하기 위해 마부의 삶을 흑백으로 보여준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영화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는 장면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부의 딸이 빨래 널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모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환경이 암울할수록 내면을 상징하는 이 순백색의 옷은 더 순수하게 보인다. 반대로 외부의 환경이나 현실이 화려하면 흰색은 어떤 것 정도로 보이게 된다. 흑백 필름의 기능은 시각적 판단이 색채 영화와는 달라진다는 점이다. 빛의 화가라 불리는 모네의 그림을 흑백으로 전환시켜보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화려한 색상은 시각적 자극이 풍부한 만큼 해석되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계절, 바람, 기온 등을 판단하게 한다. 흑백의 이미지에서 유일하게 측정되는 것은 시간성이다. 집과 풍차의 공간과 시간성만이 해석을 요구할 뿐이다. 흑백 영화를 제작한 가장 첫 번째 이유로는 해석되는 것들이 단순화됨으로써 주제의 대상인 배우가 처한 현실에 집중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비극적 현실에 관한 사유의 끈을 놓지 않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인 것이다. 측정의 단순화는 다른 것에 집중하게 한다. 자신의 시선이 아닌 감독과 배우의 시선을 찾아내게 한다.
색채 인물화에서 제일 먼저 판단하는 것은 장소와 인물, 빛의 위치다. 측정의 단순성은 시선을 확인하게 한다. 모네의 아들 쟝과 까미유 너머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서 모네의 시선이 확인된다. 아들 쟝의 시선과 아내의 시선도 확인된다. 인간이라 판단되는 어떤 대상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감각적 습관 때문에 배우의 눈과 시선을 확인하게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배우들은 관객의 시선을 피하고 영화상의 현실인 메마른 계절을 응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도 영화상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정원에서 모네의 부인 까미유가 바느질을 하고 곁에는 아들 쟝이 그림책을 보고 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날로 기억될 그림이 무채색으로 바뀌면 여인은 길바닥에서 바느질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주인공들이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흑백영화에서 옷차림은 인물의 지위를 확인해 주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만이 시선에서 포착된다.
사진출처 : https://brunch.co.kr/@eunjubloomson/15
흑백 영화가 제공하는 세 가지 기능을 통해 "토리노의 말"은 배우들의 행위와 표정에 집중하게 한다. 그들이 처한 환경과 행위의 소리들을 듣게 한다. 메마른 바람소리, 건조한 일상의 대화, 반복적인 움직임. 삶에서 나오는 사실주의적 소리만 들린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소리는 단연코 감자 먹는 소리다. 숨을 쉬는 것인지 아픈 상처를 위로하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자 먹는 소리는 슬프게 들린다. 먹는 모습조차도 자본주의의 습관대로 소비하는 대중들의 탐욕을 보여준 과정 미술가 재닌 안토니의 "갉다"라는 작품의 실제 과정을 보여준다. 신체를 위해 먹는다기 보다는 갉아대는 쥐들처럼 희망이나 절망을 찾을 수 없는 가난이라는 생감자를 관습처럼 갉아먹게 하며 영상은 끝난다.
예술은 자신의 작품 안에 오랜 시간 시선을 잡아두려 하기도 하지만 출구도 제시한다. 말이 마부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면 생감자 씹는 소리는 영화의 공간을 떠나 생감자의 씁쓸한 맛을 잊게 될 맛있는 식사를 즐기며 위안과 평온을 경험하는 관객의 일상이 영화의 출구이자 끝이다. 어쩌면 감독이 소중히 다루려 했고 지키려 했던 것은 관객의 일상일지도 모른다. 감독이 니체의 정신 변화 3단계를 가져온 이유는, 션 스컬리가 지적했듯 "어떤 것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그것의 본질"이듯 마부의 삶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니체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낙타와 같은 노동자 마부의 본질을 보여준 것이다.
시각예술인 영화도 동시대성을 추구한다. 시대의 문제를 끊임없이 들춰내고 알리려 한다. 고전 서적과 그림들을 보는 이유는 옛사람들이(니체를 포함해서) 동시대의 문제를 직시했다는 점에 있다. 고전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예술의 역할은 슬픔을 보게 함으로써 공감하게 하고, 공감한 사람들을 연대하게 하며 비극적인 상황을 예방하고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다. 동시대성은 고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제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토리노의 말"이 전하는 당부다.
예술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화가는 눈만 있고, 음악가는 귀만 있고, 시인은 심장의 서정성만 갖고 있는 바보들이라 생각하는가?
예술가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형성하며 끔찍하고, 열정적이며, 즐거운 사건들을 끊임없이 알리는
정치적인 존재다.
회화는 아파트 장식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에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무기다.
파블로 피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