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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카이빙

다정한 호흡법

아카이빙

by 박가람




한때 여자 친구는 내가 푸린같다고 했다. 옆에 누워있으면 너무 깊게 잠들어 버린다고.

그건 내가 옆에서 몰래 작은 소리로 푸푸르르푸푸린 푸푸리이인~ 노래를 불러서 그런 게 아니라

나만의 다정한 호흡법을 이용해서다.


참고로 이 호흡법을 시행하기 전에 이불속에서 서로 부비적 부비적대며 열심히 놀아야 한다.

운동에너지를 일정량 소모해줘야 피로도가 쌓여서 더 깊은 잠에 들 수 있다.


이불속에서 같이 놀던 여자 친구가 스르르 눈을 감으면 팔 배게를 해준 뒤 다정한 호흡법을 시행한다.

먼저 조용히 숨소리를 들어본다.

방금 잠든 여자 친구의 숨소리는 너무 소곤소곤하다. 눈 내리듯 숨을 쉰다.

숨소리가 조금씩 머리맡에 쌓여갈 때쯤

천천히 그 숨소리를 따라서 내 숨도 들이쉬고 내쉬어주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왠지 서로 같은 템포의 숨을 같은 공간에서 가지면 안정감을 줄 것 같아서..


여자 친구의 숨을 따라 쉬는 동안은 숨을 최대한 작고 미세하게 내쉬어야 한다.

보통 팔 배게를 해주면 내 코가 항상 여자 친구 이마 위에 위치하게 되는데

그때 내 콧바람이 이마를 간지럽혀 잠을 깨워버릴까 봐..

딱 산소부족으로 죽기 직전까지 미세하게 조절된 숨을 쉰다.

소리 없이 다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건지..

그러다 여자 친구의 숨소리가 무음에서 쌕쌕 정도로 바뀌면 그제야 나도 숨을 좀 크게 쉬는데

잠깐 또 살짝 깬듯 뒤척일 때면 잔뜩 쫄아서 나는 또 소리 없이 다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시간을 반복하다 보면 숨소리가 쌕쌕을 넘어서서 아기 드르렁 단계 직전으로 돌입하고

나는 팔을 살.. 짝.. 빼내고 원고 작업을 하러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이 과정이 나를 푸린으로 만들어주는 다정한 호흡법의 과정이다.

여자 친구를 편히 재운 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시간이 나는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으며 일할수 있다는 건 엄청난 사내 복지다.

이 회사에 정직원으로 취업하려고 이래저래 노력하고 있다.


여자 친구는 늘 자기 자는 동안 내가 깨있는걸 불만스러워한다.

내가 너 밤새 코 골더라 이상한 잠꼬대 하더라 이상한 자세하더라 등등 놀려대서..

뭔가 자기만 흑역사 생기고 손해 보는 것 같다고..

그래도 이걸 읽으면 좀 덜 미워하겠지.


여하튼 푸린의 비밀은 호흡법에 있고

안정감은 숨과 숨 사이에

다정함은 코와 이마 사이에

행복은 침대와 책상 사이에

사랑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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