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처 2018년 11월호 'Artist Inside'
조각가 최하늘은 전형적인 소조 재료부터 영상, 음악, 레디메이드까지 적극 포용하며 조각이라는 매체의 확장 가능성을 증명한다. 동시대 사회적 이슈와 미술사 레퍼런스로 점철된 그의 작업에는 ‘조각의 미래’를 상상하는 태도가 늘 배어있다. 그는 올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2018. 9. 5~11. 18 서울시립미술관), <Beyond Thinking>(2018. 10. 12~12. 2 고양아람미술관)전 등 7개의 전시에 참여하며, 조각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공유했다. 이 비전의 서사는 무엇이고, 왜 이를 창안했을지를 염두에 두고 최하늘의 작업세계를 따라가 본다. / 한지희 기자
문화 황무지나 다름없는 신림동 주택가에서 보기 드물게 ‘힙한’ 카페가 문을 연 모양이었다. 노출 콘크리트 천장, 하얀 벽, 스탠드식 좌석, 팬시한 오브제들은 SNS에서 볼 법한 카페를 연상시켰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시트지 인테리어, 염가의 스툴과 짝퉁 테이블을 보고 점주의 미감에 실망하다, 쟁반에 담긴 디저트가 모조품이란 사실에 당혹감을 느낄 즈음 이곳이 실은 노골적으로 카페처럼 연출된 공간임을 깨닫게 됐다. 얼마 전 산수문화에서 열린 최하늘의 개인전 <카페 콘탁트호프>(2018)의 풍경이다. 입체 병풍 연작 신작과 작은 오브제, 기성 제품이 ‘연기하는’ 전시공간에 다른 회화작가의 개인전을 초대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됐다.
전시 제목 <카페 콘탁트호프>는 ‘탄츠테아터’의 창시자 피나 바우쉬의 대표작 <카페 뮐러>와 <콘탁트호프>를 결합한 단어다. 공연명에서 참조한 제목은 ‘공간의 무대화’에 알리바이를 제공함으로써 출품작 사이에 요구되는 논리적 당위성을 손쉽게 해결한다. 또 무용사에서 탄츠테아터가 갖는 의의, 즉 기존의 것을 전유해 한 단계 발전해 나가려는 의지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표방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카페와 전시에서의 경험이 똑같이 디지털 이미지로 쉽게 소비되는 현상을 직시하고 원본과 모조품, 장식과 작품, 디자인과 미술의 구분이 모호한 환경을 상정해, 이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지를 실험한다. 그것은 조각이라는 매체의 존재론과 작가의 역할을 다시금 자문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4년여간 최하늘이 선보인 작업은 종국에는 ‘조각’이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한다. “청소기나 가구가 조각보다 멋지고, 미술영역 안팎에서 빠르게 비물질화가 진행되면서 조각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는 오늘날, 조각가로서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이 든다.” 그는 조각의 물성과 기능을 정립하는 데 골몰한다. 그는 시점이 다르면 자연히 보는 광경도 다르다는 점에 흥미를 느껴 전시장에 기단을 설치하거나, 사방에서 조각을 볼 수 있도록 동선을 짰다. 스티로폼, 석고, 목재 등 전통 소조 재료로 상을 만들 뿐 아니라 최근에는 레디메이드 오브제까지 작업에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고민의 끝자락에 이 매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하는 일은 당연지사다.
올해 신작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각기 다른 주제와 소재를 경유해 제시한 결과물이다. <이브>(2018)전 출품작 <추격자–에코 하이브리드와 사랑의 신>은 산수문화전의 디자인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에 비하면 더욱 직관적이고 명징하다. 불꽃이 일렁이는 좌대 위의 인체 조소상은 아이돌의 신상이자 차세대 인류의 모습을 구현한 기념비로, 셀 수 없이 많은 상징을 내포한다. 산소 호흡기 같은 마스크, 다이슨 공기청정기를 변형한 지물, 호버보드와 에어팟, 배경에 깔린 아이돌 노래 등은 환경문제나 기술력 발달, K팝의 주류화와 같이 가까운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현재의 사회적 이슈를 호출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나 <Beyond Thinking>전에는 가족, 양육과 관련된 기하학적 추상조각을 선보였다.
방법론: 도해에서 전유까지
“작년까지만 해도 조각에 한정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조각의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현상, 내 앞에 펼쳐진 것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올해 유난히 많은 화두를 각 작업에 배치하게 됐다.” 미술 밖 담론에도 관심이 많다는 그는 하고 싶은 말도 호기심도 많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그마다 조금씩 다른 조형어법을 사용하다 보니 작업이 다 달라 보여 독해가 어렵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태도가 성격에 맞지도 않고, 개별 작업과 전시가 독립적이길 원한다”는 작가의 바람을 고려하면 작업 전반을 꿰뚫는 주제를 찾으려 애쓰기보다 좀 더 근본적으로 ‘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됐을까’를 묻는 편이 그의 작업세계에 가까워지는 길일 테다. 그럼에도 지난 작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시적인 차원에서 반복되는 질문과 모티프가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최하늘 세계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얽히고설킨 맥락 망을 이루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최하늘은 “2015년 학사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도해조각연습–생선 선>, <일필휘지 조각–큰 풍경/작은 풍경>, <무협극–생량>이 초반 작업을 이루는 큰 뼈대가 됐다”고 고백한다. 3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조형방식은 하나, 어떤 정서나 추상적 개념을 도해하고, 이를 조각 매체로 시각화한다, 둘, 그 결과물을 어떤 서사 속에 배열해 하나의 캐릭터처럼 취급한다로 대별된다. 이는 따로 또 같이 변모, 발전하며 2018년까지 계보를 잇는다. <디셈버>(2017)전에서는 기후와 풍경이라는 키워드에 부응해 ‘기설(祈雪)’의 정념을 도해하고, 일필휘지의 어법으로 설경을 표현했으며, 이어지는 <기념돕기조각> (2017)전과 <로터스랜드>(2017)전에서는 본격적으로 조각의 의인화를 전개했다.
합정지구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 <노 셰도우 세이버>(2017)에서는 3D도 2D로 인지하는 오늘날 ‘조각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은 공유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조형어법을 제시했다. 바로 물체의 두께를 의식해 조각의 내부로 눈을 돌리는 것. 이 전시에는 검의 회전 베기 동작인 물리네를 전유해 대상을 불규칙적으로 절개하고 단면을 드러내는 시각화 방식이 등장했다. 이때 절삭된 소재 중 토르소, 즉 인체는 이 무렵 주요 모티프로 대두한다. “인체에 대한 관심은 조각 전공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입시와 정규 교육을 거치며 인체를 꾸준히 소조하고, 또 가장 익숙한 매스니까. 그런데 인체 조각을 한 장르로 본다면, 외형의 사실적 재현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그 내부를 가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여 속을 채우고, 베어내고, 뒤틀었다. 인체 조각의 다음 국면을 나름대로 예상한 결과였다.”
인체보다 앞서 고정 모티프가 된 것은 병풍이다. <디셈버>전 당시 도해한 풍경을 4폭 병풍 틀에 집어넣어 ‘입체 병풍’의 전형을 이뤘다. 회화장르를 주 어휘로 삼은 계기는 “평면인데 접히거나 펼쳐지고, 벽에 걸리는 것이 아닌 바닥에 놓인다는 점이 조각 같았다. 회화이자 동시에 조각이 되는 이 매체의 태생이 매력적”이었기 때문. 병풍뿐 아니라 족자 형태, 난초나 일월오봉 같은 문인화 소재, 한자 등 전통적 모티프를 유달리 등장시켜 ‘전통을 좋아하는 작가’라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전통에 대한 향수-계승의 차원이 아닌 이것이 현재 어떻게 차용되고 변형되는지, 동시대 전통의 향유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작업에 원형 그대로를 소환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표면만 떠와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혼합해 다시 제시한다. 근본도 없고 엉터리라는 평가를 들을지언정 이편이 더 재밌고, 더 큰 가능성을 본다.” 작가는 ‘전통’이 ‘현대’와 버무려져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는 데서 희망을 느낀다고 선언한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산수문화의 기존 전시와 확연히 다른 외양을 띤 <카페 콘탁트호프>를 통해 관객을 당황시킴으로써 이 공간의 지향점인 ‘전통의 현대적 정의’에 의견을 보탰다. 핵심 작업인 <입체병풍 4번>은 매스를 부풀리거나 오브제를 덧붙이는 등 입체성을 극대화하고, 과감한 색과 재료를 택해 ‘이것은 과연 병풍일까’를 물었고, 동시에 회화도, 조각도 아닌 애매한 병풍의 태생을 상기시키며 ‘도대체 조각은 무엇일까’로 귀결했다. ‘카페’ 한편에 늘어놓은 작업일지와 메모에는 앞으로 조각을 매체로 시도할 실험 설계안이 빼곡히 적혀있다.
조각의 미래: 만들고 길러보기
올해 그는 ‘조각 육아’라는 상황극을 도입했다. 조각을 인간처럼 대하는 ‘퀴어’한 태도가 전보다 한층 정교한 서사를 수반하고 인간과 조각의 관계를 탐구하는 긴 호흡의 실험으로 도약했다. 서사 안에서 작가는 조각가이자 양육자로서 세 쌍둥이 장, 졸리, 부기를 키우는 역할놀이에 심취한다.
“작가와 부모는 남성 조각가와 여성 조각가로 전치할 수 있다. 보통 미술사에서 전자가 창조자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후자는 대상을 돌보고 키워내는 양육자의 입장으로 대변된다. 나는 두 입장에 다 공감하기 때문에 이를 합칠 수 있는 모델을 찾다 고안한 개념이 ‘조각 육아’다. 육아라는 상황에 맞게 기본적 줄거리는 거의 다 짜였다. 작가와 부모라는 역할 사이에서 느끼는 혼동이 자연스레 작업이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비엔날레와 <Beyond Thinking> 출품작은 그 구체적 에피소드를 구현한 것이다. 고양에서는 첫돌을 맞은 세 쌍둥이가 유모차에 실려 돌상을 받고, 서울에서는 2056년 첫째 장이 가족과 함께 미술관에 나들이를 나와 있다. 첫째는 과학 윤리학자가 되고, 둘째는 정치인, 막내는 산수문화전의 메모가 암시하듯 작가가 돼
최하늘과 2인 전을 가질 예정. 이러한 설정은 이후 해당 직업과 관련된 담론을 작업에 끌어들이기 위해 치밀히 계산된 장치다. 시제는 이미 뒤섞였으므로 시기에 맞춰 적절한 에피소드를 꺼내고 상황에 따라 여러 해석의 층위를 포개면 된다. 가령 비엔날레작의 경우 미래의 미술관을 상상하며 조각을 만질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실제로 출품작을 만져보도록 안내한다. 작가는 이를 기회로 대상을 만지며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동시에, 작품을 상품으로 여겨 보험가를 책정하는 태도에 반기를 드는 셈이다.
조각 육아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개별 작품이 서구 모더니즘 미술사의 주된 유산을 언급한다는 사실이다. 장의 가족이 관람하는 전시에는 자코메티, 피카소, 헨리 무어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놓여있다. 그뿐 아니라 세 쌍둥이는 근현대 추상조각의 역사에서 중요시되는 세 작가를 은유한다. 최하늘은 육아와 창조라는 행위를 매개로 모더니즘 조각사를 재구성하고, 그 논의를 확장하려는 것이다. “조각의 미학적 영역과 사회적 의미, 정치적 요소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를 연결하는 이 작업을 통해 나는 궁극적으로 조각 매체의 미학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사회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탐색하고자 한다.(작가노트)” 수많은 담론과 참조를 걷어내고 최하늘이 던지는 질문을 직시해보자. ‘조각이라는 오래된 매체를 어떻게 갱신할 것인가?’ 이것은 곧 ‘조각의 ’ 미래를 묻는 것일 테다.
* 최하늘 / 199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조소과 학사, 한예종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로스앤젤레스 커먼웰스&카운슬갤러리(2018), 산수문화(2018), 합정지구(2017)에서 개인전 개최. <장르 알레고리 - 조각적>(토탈미술관 2018), <Beyond Thinking>(고양아람미술관 2018), <eve>(왕산로9길24 2018), <취미관>(취미가 2017), <2×2>(시청각 2017), <로터스 랜드>(광주 국립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창조원 2017) 등 단체전 및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2018) 참여
원고 작성: 한지희
교정 교열: 김재석
디자인: 진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