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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ch Mar 22. 2019

선형을 벗어난 시간

아트인컬처 2018년 12월호 'Artist'

벨기에 출신의 피터 부겐후트와 마리 클로케가 2인 전 <Temporalizing Temporality(시간화하는 시간성)>(11. 8~2019. 1. 14 제이슨함)을 열었다. 정식 전시로 국내에 작업을 선보이기는 둘 다 이번이 처음이지만, 겐트의 유서 깊은 기관인 돈트-데넨스미술관을 비롯해 퐁피두센터, MoMA PS1, 팔레드도쿄 등의 전시에 참여한 명망 높은 작가들이다. 부겐후트는 폐기물이나 다름없는 하찮은 오브제를 모아 거대한 조각으로 재구축한다. 반면 클로케는 촬영한 이미지를 조합하고 수채를 더해 평면 위에 새 공간을 창조한다. 서로 다른 매체와 방법론을 실천하지만 오랜 인연이 무색하지 않게 작품의 미감이 닮아 있다. 흔히 말하는 ‘아름다운’ 것 대신 쓸모없고 텅 빈 것이 작업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 25년 지기는 작가로서 비슷한 소재에 흥미를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과연 그들은 무엇에서 영감을 얻고, 이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첫 한국 전시를 기념해 전시 주제와 출품작을 중심으로 두 작가의 작업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한지희 기자



Art 한국에 처음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기념비적인 전시입니다. 어떤 인연으로 2인 전을 갖게 됐는지부터 먼저 이야기해볼까요? 

MC 전시는 제이슨함의 함윤철 대표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그와 잘 아는 사이며 내 친구이기도 한 작가 쿤 반 덴 브룩이 나를 함 대표에게 소개해주었죠. 그런데 제 작업이 모두 평면이라 그가 같이 전시를 하고 싶은 작가가 있는지를 물어왔고, 저의 추천으로 피터가 함께 참여하게 됐어요.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이웃사촌이고 또 부부끼리도 친한 사이랍니다.


Art 2인 전은 둘의 작업을 어떻게 하나의 주제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번 전시는 ‘시간성’을 키워드로 삼았는데,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개념에서 연유한 것이라 했죠. 이 개념이 무엇을 가리키며 작품과 어떻게 맞닿아있는지 설명 부탁합니다.

MC 시간성이란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이 아닌, 현재에 근거하는 일시적 순간이라 이해했습니다. 함 대표는 우리의 작업에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함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기억 속에 통합된 시간, 혹은 ‘시간성’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어요. 제 작업에 대한 그의 해석이 무척 흥미로웠고 제안한 주제 역시 제 방법론을 잘 설명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작업실에서 무언가를 구축함으로써 순간을 포착합니다. 과거와 현재에서 가져온 여러 이미지를 조합해 그 사이의 연관성을 만드는 것이 저에겐 중요한 예술적 실천방법이에요. 이때 반드시 연대기 순서에 따르지는 않고요. 어제 찍은 사진과 10년 전의 이미지를 섞고, 과거의 것을 최근 것 위에 배치하기도 하죠. 촬영 지역 역시 이곳저곳이 혼재합니다. 제가 만든 콜라주는 일종의 정신적 구축물이에요.

PB 제 작업에도 마찬가지로 시간의 층위가 혼재해 있습니다. 저는 먼지, 머리카락, 금속, 동물의 일부 등을 합쳐 작품을 만드는데, 작업을 이루는 재료 중 무엇이 먼저 만들어졌고 무엇이 그다음인지 전혀 알 수 없어요. 제가 무엇을 먼저 붙였는지 그 선후관계 역시 알기 어렵죠. 완성한 후 돌이켜보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조차 기억을 못 하기도 해요. 하루는 친한 콜렉터 프랭크 베네이츠가 다른 여럿과 작업실에 와서 작품을 설명해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대강 과정을 이야기해주니 그가 나중에 귓속말로 “이봐 피터 솔직히 말해. 이거 어디서 파낸 거야”라며 장난스럽게 묻기도 했어요.(웃음) 이처럼 제 작업은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죠. 그러나 분명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관점을 달리하면 미래의 오브제가 될 수도 있어요. 미래의 시점에서 우리는 동시대라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Art 두 분이 다루는 매체나 방법론은 매우 다르지만 결국 다른 시공간대의 산물을 한 시점에 가져와 새로운 공간에 구축해낸다는 뼈대는 공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PB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작업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보다 둘 다 비슷한 것에 흥미를 갖고 영감을 얻는다는 점이에요. 우리는 특정 문화권과 밀접하다거나 그 문화권 안에서 전해지는 서사를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지진이나 자연현상같이 전 인류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그래서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선행적으로 알고 있을 필요가 없죠. 이는 우리 작업이 갖는 이점이자 이 전시의 특징이에요.

MC 맞아요. 피터와 나는 둘 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삶에 관심을 둡니다. 기법 면에서는 매우 다르지만, 뭐랄까, 문화권을 벗어나 인간으로서 본능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에 이끌리죠. 내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 그에게도 흥미로운 소재가 될 것이라 예상해요. 가령 제 작업의 기틀을 닦은 <누아디부> 연작은 서아프리카 모리타니아에 있는 동명의 해안마을에서 촬영한 이미지로 만든 것인데요. 이곳에는 난파한 배의 무덤이 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저는 바로크 회화, 구조주의적 조각을 떠올렸어요. 피터 역시 이곳에 방문하면 필히 새로운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PB 본능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좀 더 명확히 말해, 어떤 이야기에 빗대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 해두죠.


Art 문화권이나 시공간을 불문하고 얻은 영감이 한 작업에 녹아드는 것이군요. 이런 소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MC 저는 제 작업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 일컫습니다. 이는 제 기법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설명적 표현이자, 작업 전반의 주제의식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에요. 저는 무언가 파괴된 장면을 다루며 여기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앞서 언급했던 누아디부에 제가 매료된 것도 같은 이치죠. 처음 이곳에 다다랐을 때 폐허와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무언가 버려진 무더기가 있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건물을 쌓아 올리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세계의 축소판 같았죠. 파괴된 곳이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는 곳. 저는 여기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이를 아름답다고 여겼습니다. 파괴된 장면을 찍은 이미지를 찢고 재배열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이미지에 부수적 피해를 입히고,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파괴된 이미지를 생산해냅니다. 저는 계속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습니다.

PB 제가 가장 강조하는 주제의식은 바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그 무엇도 말이에요. 이 명제를 나름대로 시각화한 것이 제 작업이라 볼 수 있어요. 저의 조각은 무언가를 표상하거나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물체입니다. 기능도, 닮은 것도 없는 완벽한 무질서를 보여주고 싶어요.


Art 작업 제작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요?

MC 저는 실패에서 시작합니다. 실패와 재도전을 반복하며 초반은 천천히, 막바지에 이를수록 빠르게 진행해요. 저는 일종의 스케치 과정으로 사진을 찍어요. 대상을 찾고, 촬영해 이미지를 수집하고, 작업실에 돌아와 어떤 이미지를 어디에 배치할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인쇄를 해요. 이미지를 찢어 다른 이미지 조각과 이어 붙이거나, 수채나 다른 오브제를 더하기도 하고요. 이런 식으로 초본을 잡아 놓은 후에는 일이 급격히 진행되죠. 어떤 부분을 더 어둡게 또는 밝게 할지, 이미지를 여기 붙일지 말지를 정말 결정해야 하거든요. 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수록, 더 큰 붓으로 그림을 그리게 될수록 빠르게 작업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미지가 그 자체로 설명하는 경지에 다다르는데, 이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작업이 완성됐다고 여깁니다.

PB 전 정말 모르겠어요. 마리는 실패와 반복을 통해 작업을 완성한다고 했는데 제 작업 과정에 실패란 없어요. 정확하게 무언가를 구축해내고자 하는 상이 없기 때문이죠. 여러 가지를 선택해서 붙일 뿐입니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은 바로 내가 만든 물체를 보고 더 이상 연상되는 서사, 물체, 이미지가 없을 때예요. 상징성이 완전히 배제될 때. 이때를 찾기 위해 무언가를 덧붙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점에서 작업을 돌려 보기도 합니다. 한 시점에서는 무언가 연상이 되더라도 다른 시점에서 전혀 그렇지 않으면 그때 작업을 마쳐요. 



Art 유난히 이번 출품작에는 색채가 적어 재료가 만들어내는 텍스처가 더 부각됩니다. 그만큼 두 분 다 재료 선택을 중요시할 듯해요.

MC 사진을 찍을 때부터 조명 즉 빛은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저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에 여전히 암실에서 일해요. 공기도 나쁘고 힘든 환경이지만 암실 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이것이 작업의 주요소가 되기 때문이죠. 드로잉 종이 위에 감광물질을 바르고 사진 이미지를 쏘아 인쇄한 뒤 그 위에 수채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종이 위에 얼룩이 지고, 붓 자국이 남는 등 우연에 기대 일어난 다양한 요소들이 작업을 이뤄요. 사진용 종이를 쓰면 광택 때문에 수채를 할 수 없어 보통 드로잉 종이를 쓰고요.

PB 저는 비천하고 버려진(abject) 오브제를 재료로 씁니다. 예를 들어 출품작인 <방투산> 연작의 주재료기도 한 소의 위장은 소의 몸 안에 있을 때만 제대로 기능을 하죠. 그런데 이것을 꺼내면 축 늘어져 아무 쓸모없는 것이 돼버려요. 이처럼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형태, 기능, 의미를 모두 잃은 이 버려진 재료들은 ‘통제 불능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제 작업에 완벽한 재료예요.


Art 마지막으로 출품작을 상세히 설명해주세요.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부겐후트씨 작업은 제목이 작업의 미적 지향점과는 상반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업은 상징성을 배제하고, 추상을 향해 가는데 제목은 구체적인 서사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들이죠. 가령 <맹인을 이끄는 맹인>은 마태복음의 내용이고, 피터 브뤼겔이 그린 동명의 작품도 있잖아요.


PB 상반되는 것은 아녜요. 연작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제목은 개별 작품 하나가 아니라 그 집체를 지칭합니다. 연작에 깃든 분위기나 미감, 철학을 나타낸 것이에요. <맹인을 이끄는 맹인>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지금 작업 위에 켜켜이 먼지가 쌓이며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는 것처럼. <방투산>은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가 올랐던 산이에요. 그는 무언가를 멀리서 볼 때 이를 구조화하고 분류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 내면처럼 가까운 것은 인지할 수 없었음을 산에 올라 깨달았다고 고백해요. 이처럼 우리는 살면서 당면한 일을 객관화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 작업의 핵심은 늘 이것입니다. 

MC <장애물> 연작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죄수가 탈출을 더 많이 생각할수록 감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어요. 어떤 장애물이 있든 죄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그 해결책을 찾아내기 때문이죠. 그것이 부당하다거나 비이성적이더라도 불가능하다 여기지 않는 이 태도를 제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적용해보기로 했어요. 또 이 연작은 포토그램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감광물질로 코팅한 종이 위에 피사체를 놓고 빛을 쏘면 피사체 부분은 하얗고 나머지 배경은 까만 네거티브 이미지를 종이에 남기는 방식이에요. 저는 감광 종이 위에 천을 올려놓고 인쇄했죠. 이 천은 말 그대로 종이와 빛 사이의 장애물이란 점에서 이 연작에 <장애물>이란 제목을 붙였어요. <불타는 대지>의 ‘scorched earth’는 적에게 진영을 빼앗겼을 때 이곳에 남아있는 쓸 만한 것을 전부 파괴하는 군사 작전명이에요. 대개 텅 빈 풍경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부수적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과 긴밀히 연관돼 있습니다. 여기 쓰인 이미지 역시 누아디부가 위치한 모리타니에서 촬영했어요. 파괴와 삶을 향한 의지가 공존하는 이곳을 저는 몇 번이나 재방문했어요. 앞으로도 이러한 우연한 만남, 영감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일 겁니다.


인터뷰 진행: 한지희

영한/한영 통번역: 제이슨함, 한지희

원고 작성: 한지희

교정 교열: 김재석

디자인: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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