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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May 10. 2023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웨딩피치〉- "그때의 설렘과 두근거림은 결코 잊히지 않겠지."


1996년, 7살의 내가 얼굴을 빛내며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다. 연립주택이 즐비한 원미동의 골목골목을 뛰어가고 있다. 반짝반짝 붉은빛을 내며 나를 변신시켜줄 ‘천사의 립스틱’을 갖기 위해. 손안에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구권 지폐를 꼭 쥐고서. 그때의 설렘과 두근거림은 결코 잊히지 않겠지. 내가 뛰어가던 그 골목, 그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웨딩피치〉*는 내가 처음으로 완구를 사게 만들었던 만화영화다. 앞서 〈달의 요정 세일러 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웨딩피치〉에 대해 잠깐 언급했었다. 〈세일러 문〉보다 후대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방영되었다고. 〈세일러 문〉을 먼저 봤으면 당연히 그 만화에 나오는 완구를 샀겠지만, 〈웨딩피치〉를 먼저 봤기에 나는 인생 처음으로 엄마를 조… 르진 않았고, 조름과 투정 그 사이의 어떤 행동을 하여 완구 살 돈 만 원을 손에 넣었다. 그래서 그렇게도 신나게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몇 주째 구경만 하고 지나쳤던  ‘릴리’의 완구 ‘천사의 립스틱’을 당당하게 집어 들기 위해서. 


빠른년생이던 나는 7살에 원미국민학교(입학할 때에는 국민학교였는데 1학년 2학기 때 초등학교로 바뀌었다)를 입학했다. 우리 집과는 약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문방구가 있었다. 국민학교 생활은 싫지 않았지만 즐겁지도 않았다. 다녀야 하니 다니는 것뿐이었다.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고학년들이 명찰 검사를 하는 바람에 학년과 반, 이름이 적힌 명찰을 항시 패용해야 했다. 담임선생님은 촌지를 준 아이와 주지 않은 아이를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입학 전부터 친했던 소꿉친구랑 같은 반이었으면 좀 더 나았겠지만 친구는 금세 이사를 가버렸다. 그럭저럭한 나날들 사이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웨딩피치〉의 한 장면이 담긴 카드(그걸 ‘트레이딩 카드’라고 부른다는 건 아아주 나중에야 알았다)를 구입하는 것과, 그 김에 전시되어 있는 릴리의 완구를 눈요기하는 것뿐이었다.


당시 〈웨딩피치〉를 보던 많은 여자애가 그랬겠지만 나 또한 주인공 3인방(나중에는 ‘사루비아’가 합류하여 4인방이 되지만) 중에서 릴리를 가장 좋아했다. 좋아했다기보단 동경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까. 부드럽게 굽이치는 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릴리는 프랑스인 할아버지와 세련된 부티크를 운영하는 부모님을 두었고 발레와 피아노를 배우는 등 부잣집 아가씨의 클리셰를 전부 모아둔 캐릭터였다. 소녀들이 마음을 빼앗길 만했다. 하필 상징 꽃도 청초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백합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변신 완구는 무려 ‘천사의 립스틱’이었다. 엄마의 수많은 화장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고르라면 매니큐어와 함께 일이 등을 다투던 그 립스틱 말이다. 당시 유행하던 립스틱은 하나같이 색이 강렬했다. 그때만 해도 30대였던 엄마는 항상 립스틱을 바르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 지었는데, 언제 봐도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밋밋한 살구색 입술 위에 립스틱을 가져다 바르면 갑자기 엄마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나는 바로 립스틱의 이런 점에 매혹되어 엄마에게 떼를 쓰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애매한 행동을 해가며 허락을 구했던 것이다.


기어코 천사의 립스틱을 손에 넣은 나. 하지만 7살이었던 나는 완구를 가지고 노는 법을 잘 몰랐다. 무엇보다 남동생이 그 완구로 노는 것을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주로 ‘박사블록’으로 비행기나 우주선을 만든 다음 그걸로 스페이스 오페라**를 찍으면서 놀거나 플라스틱 칼 등을 휘두르며 놀았기에 립스틱 완구가 낄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스위치를 눌러보며 ‘웨딩 릴리’의 변신 신을 몇 번 흉내낸 것이 전부였다. 결국 언젠가부터 천사의 립스틱은 빛이 나지 않게 되었다. 이 사실을 엄마 아빠에게 말하자 둘은 건전지만 갈면 된다고 했지만, 새 건전지로 갈아 끼우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완구는 침대 밑에 먼지투성이가 된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눈독을 들이던 천사의 립스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더 이상 완구 사는 일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천사의 립스틱보다 더 크고 화려한 ‘천사의 요술봉’이 출시되었지만 언감생심이었고… 당연하게도 〈세일러 문〉 완구 역시….


내가 택한 굿즈는 결국 책이었다. 그 문방구에서는 〈웨딩피치〉 책도 팔았다. 내용이야 어쨌든 외형은 책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가격도 완구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았기에 엄마도 이것만큼은 눈감아주었다. 완구를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자연스레 책을 샀던 걸 보면, 그때부터 될성부른 편집자의 떡잎이 보였던 걸지도.***


원미국민학교 앞 동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있던 문구점. 내게 처음으로 만화영화 속 완구를 구입하는 기쁨을 안겨주었던 그곳은 이제 없더라. 이름마저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썼던 새모습 생활일기를 뒤지면 나오기야 하겠지만. 꿈나무 어쩌구 하는 이름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천사의 립스틱을 사려고 뛰어갔던 길의 지도를 검색한 뒤 로드뷰를 봤다. 그런데 매우 당황스럽게도 동네가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던 다가구주택과 단독주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전부 원룸 건물뿐. 우리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였던 한아름슈퍼 맞은편엔 세븐일레븐이 들어섰고, 원미국민학교 옆에 있던 원미구보건소도 2005년에 신축 이전을 해서 없어졌다. 외벽에 전부 시트지를 붙여서 음산해 보이던 오락실도, 유난히 강아지를 많이 길렀던 친구네 집도… 나는 지금도 그 동네의 약도를 그리라면 그릴 수 있는데, 그 모습은 이제 없다. 아아,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전부 어딘가로 가는 것일까. 우리가 사랑했던 동네는, 내가 아끼던 그 완구는 전부 어디로 갔는지.      



* 원제는 애천사전설 웨딩피치愛天使伝説ウェディングピーチ).


** SF 장르 중 하나. 주로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소재로 삼고 있다. 우리말로는 ‘우주 활극’이라고도 부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스타트렉 시리즈〉와 〈스타워즈 시리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 등이 있다.


*** 내 친구가 이미 다른 글에서 썼던 바 있지만 나는 어디에도 쓴 적이 없기에 여기에 소소하게나마 밝혀본다. 난 출판 편집을 그만두고 프로그래밍을 배우겠다면서 프로그래밍 책부터 몇 권 구입하는, 정말 편집자스러운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 그마저도 친구들이 ‘누가 요새 프로그래밍을 책으로 배우냐! 유튜브로 배우는 세상인데!’라고 말하여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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