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인터넷에 떠도는 말이 있다. 〈아기공룡 둘리〉를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봤을 때 고길동 아저씨의 마음을 이해하게 있다면 어른이 된 거라고. 이에 힘입어 여러 재평가도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아직도 난 길동이 아저씨를 이해하기 힘들다. 왜 그럴까? 길동이 아저씨가 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자가에 살고 있고, 아이가 둘이나 있는 40대 남자 과장이라 그런가. 난 경기도에 살고 있고 아이가 없는 30대 중반 여자이니, 그와는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둘리가 좋다. 나의 공룡기*에는 3살 차이 나는 남동생과 스티븐 스필버그(〈쥬라기 공원〉!!!), 그리고 둘리가 지대한 기여를 했다. 둘리로 말할 것 같으면 TV판 〈아기공룡 둘리〉와 비디오 〈둘리의 배낭여행〉 시리즈, 그리고 극장에서 개봉했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까지 전부 보면서 자랐으니 길동이 아저씨보단 둘리에게 정을 붙인 것도 당연하다. 아닌 게 아니라 둘리는 정말 내 또래 아이들의 공룡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오는 5월 24일, 4K 버전으로 새롭게 개봉한다는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 대해서. 1996년 7월에 개봉했다니 27년 만에 극장에 다시 걸리는 셈이다. 나는 이 작품을 그때 당시 개봉하자마자 바로 본 것 같진 않다. 극장에서 본 기억은 없고 브라운관에서 봤던 기억만 생생하니, 아마 1999년 식목일에 KBS 2TV에서 방영한 버전을 본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땐 조금 낯설었다. 일단 둘리의 색감부터가 달랐다. 작중에 잠깐 등장하는 ‘고길동의 형’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몸에 멍이 든 것처럼 퍼런”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 내가 알던 둘리의 색을 컬러코드로 표현하자면 #006600 정도였는데, 이 작품 속에서의 둘리는 연두색이나 옥색에 가까운 #4CCD97였으니까. 게다가 성우들의 목소리도 달랐고(특히 길동이 아저씨!) 무엇보다 스토리라인도 달라서 “이게 뭐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극장판인 만큼 평행우주 설정이었다는데, 어릴 땐 그런 개념을 몰랐으므로 보는 내내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재밌었으니까! 동생이랑 홀린 듯이 보면서 깔깔 웃었다. 둘리 혼자 있을 때보다 또치와 도우너가 차례대로 등장하면서 이 셋이 고길동과 만들어내는 티키타카가 재밌었다. 개인적으로는 길동니 아저씨의 낚싯대에 걸려 들어온 또치가 쫓겨날 때까지의 장면과 도우너가 아저씨의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대치하는 장면(무려 〈황야의 무법자〉의 패러디다!), 그 뒤에 길동이 아저씨를 혼내주자며 셋이 도우너의 타임 코스모스를 타고 과거로 날아갔던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누구나 했을 법한 생각 아닌가! 얼음별에 도착하면서 일어나는 우당탕탕 좌충우돌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을 테고.
바로 이 우당탕탕 좌충우돌 때문에 둘리를 좋아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둘리에게 마음이 간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의 나는 정말로 산만하고 요령이 없는 아이였기에, 뭔가 잘해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잘못되거나 망해서 야단을 듣는 경우가 잦았다. TV 속의 둘리를 보면 그때의 내가 보인다. 초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적재적소에 능숙히 쓰질 못해 엉망이 되는 둘리를 보면, 내가. 지금도 뭔가 잘해보려 하는데 잘 안 되어서 애를 먹거나, 속이 상하거나 남에게 핀잔을 듣게 되면 둘리가 떠오른다. 그때 둘리의 마음을 이해하던 아이가 커서도 둘리를 생각하게 하다니, ‘둘리의 아버지’ 김수정 화백은 정말 좋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둘리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가 그렇다. 둘리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귀엽지만 얄미운 희동이도 내 남동생과 무척 닮아 있다. 외우주에서 뚝 떨어진 건방진 외계인 도우너와 라스베가스를 들먹이며 잘난 척하는 또치도 내가 가진 모습 중 하나다. 첫머리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써놨지만 내 안에는 분명 길동이 아저씨 같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사실 길동이 아저씨도 나쁜 어른은 아니지 싶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고아 난민 아이들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 끌어안은 채 사는 걸 보면. 혹자는 이 작품이 연재되던 1980년대에 만연했던 식객-객식구 문화가 반영된 거라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무래도 나만 이 인물들을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은 그 당시 기준으로 서울에서만 12만6872명이라는 관객수를 기록했으며 전국 관객수는 45만 명을 기록했다니 말이다. 문화체육부가 주관한 ‘좋은 만화영화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건 물론이고 해외에도 수출하여 나름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워너브러더스 측에서 공동투자를 하는 조건으로 다음 극장판 제작을 제안했지만 IMF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자금이 부족해져 금융회사에 대출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이때 둘리의 저작권을 담보로 삼아 6억 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동안 한국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업계는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돌아온 영웅 홍길동〉, 〈블루 시걸〉, 〈아마게돈〉, 〈원더풀 데이즈〉…), 이만하면 〈아기 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은 여러모로 극장판 애니메이션 업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씩씩하게 살았지만 어딘지 외로움이 느껴졌던 둘리. 그리고 그런 둘리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나. 이 둘을 함께 감싸주던 건 가수 오승원의 목소리였다. 나는 “쏘옥쏙쏙 방울 빙글빙글”으로 시작하는 삽입곡 〈비누방울〉을 들으면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물론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도 중간중간 좋은 노래들이 삽입되어 있다. 하지만 오승원의 목소리는 다르다. 어쩐지 애잔하고 향수가 느껴지는 맑은 목소리. 그 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속 상처가 포근히 덮히는 것만 같다. 오승원은 최근 프로듀서이자 아티스트인 250의 앨범인 《뽕》의 마지막 트랙 〈휘날레〉를 불렀다. 출퇴근길에 치유가 필요하면 그 노래부터 찾는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아이들은 미숙한 게 당연하다.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모르는 게 많으니까. 둘리처럼, 도우너처럼, 또치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어른인 우리가 기다려주자. 타박하지 말고. 너무 시혜적인 태도로 가르치려 들지 말고. 윽박지르지도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자. 용기를 북돋아주자. 뻔한 말 같겠지만 그럴수록 실천은 더욱 어려우므로, 노력하자. 그때의 내게, 그때의 우리에게 필요했던 바로 그런 어른이 되어주자. 음… 길동이 아저씨 같은 어른 말고!
* 공룡기(其)란? 어린아이들이 주로 관심을 두는 물품으로 성장과정을 구분하는 비공인·비공식적 단어. 보통 어린이들은 자라며 공룡기, 자동차기, 로봇기, 곤충기, 공주기, 마법소녀기 등등을 겪으며 그 순서와 기간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 정말 좋은 앨범이니 이 기회에 한번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휘날레〉만이라도 들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