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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Apr 26. 2023

천사소녀 네티는 10만 원을 훔쳐 갔습니다


월급이 들어온 지 고작 10일이 지났는데도 돈이 없다는 얘기를 직장 동료인 C씨와 하던 중이었다.


나: 나 이번에 정말 돈이 없어요. 이번 달에 카드값 10만 원 넘게 나가서 아껴야 하는데….

C 씨: 아, 나도요…. 완전 망함.

나: 돈 아껴야 하는데 다음 달에도 카드값이 10만 원 넘게 나가게 생김…. 미쳤나 봐요….

C 씨: 나돈데. 님 그거 했죠? 텀블벅에서 〈천사소녀 네티〉 오르골 후원했죠?

나: 엥 아니 미친, 어떻게 알았음??????????????


그랬다. 평소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애용하는 나.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며 과거의 마법소녀들이 ‘추억’ ‘향수’ ‘그리움’이라는 태그를 달고 속속 돌아오는 것을 자주 보았다. 〈꼬마마법사 레미〉 〈신풍괴도 잔느〉 〈달빛천사〉 등….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마마법사 레미〉 프로젝트에는 내가 원하는 굿즈가 없었고, 〈신풍괴도 잔느〉는 본 적이 없었으며, 〈달빛천사〉 또한 나보다는 내 아랫 세대들이 보던 만화영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 같던 그날. 언제나처럼 별생각 없이 텀블벅 메인 페이지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떠 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27년 만의 귀환! 〈천사소녀 네티〉 세인트코롱 오르골


마치 알고리즘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동안은 후원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갔지? 그럼, 이건 어떨까? 과연 이걸 보고도 네가 그냥 지나갈 수 있을까…?”


나는 손을 덜덜 떨며 이미지를 클릭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최고 금액의 후원금을 넣은 뒤였다. (관계자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후일 자금 사정 때문에 최소 금액으로 변경해야 했다…. 그, 그치만 변명을 해보자면 최소 금액이라 해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만 원대라구욧!) 


난 왜 그랬을까? 왜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까? 


일단 기존에 보아왔던 〈천사소녀 네티〉의 굿즈는 대부분 ‘네티’가 갖고 다니는 요술봉을 본뜬 것이 많았다. 변신할 때 쓰는 펜던트가 상품화된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펜던트를, 그것도 전시할 수 있게끔 일 대 일 사이즈의 오르골로 만든다니. 이런 굿즈는 앞으로도 나올 가능성이 전무해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던 마법소녀물인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이나 〈웨딩 피치〉 〈카드캡터 체리〉등에 비하면 〈천사소녀 네티〉는 이상하리만치 언급이 적었다. 무려 시청률 20퍼센트를 넘긴 작품인데도! 그런 〈천사소녀 네티〉의 굿즈가 다시 나온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그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예뻐서 그랬다. 


나와 같이 1990년대에 만화영화를 보았던 이들이라면 〈천사소녀 네티〉를 앞서 언급한 〈달의 요정 세일러 문〉과 〈웨딩 피치〉 〈카드캡터 체리〉와 묶어서 기억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중반의 마법소녀물의 사천왕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여러모로 따져 보면 〈천사소녀 네티〉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이게 또 재밌는데, 엄밀히 나누자면 이 작품은 마법소녀물이 아니다. 만화를 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주인공 ‘샐리’는 마법을 쓰지 않는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마술을 쓸 뿐. 일단 원제부터가 〈괴도 세인트테일(怪盗セイント・テール)〉이다. 평범한 여학생인 ‘샐리’가 ‘천사소녀 네티’로 변신할 때도 마찬가지다. 연출은 뭔가 마법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눈속임 마술의 일종이다. 유명 마술사인 아빠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나온다(그렇다고 아빠가 ‘천사소녀 네티’로서의 활동을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엄마 역시 지금은 그저 전업주부처럼 보여도 한때는 ‘괴도 루시퍼’로 이름을 날렸기에(?) 샐리는 그 나름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법이 등장하지 않는 만큼 〈천사소녀 네티〉의 최종 목표는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세계를 구하는 데 있지 않았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을 다루기에 마지막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막판에 캐릭터들이 죽어 나가거나 세계가 뒤흔들리는 거대한 위기를 맞는 바람에 심각하게 봐야 했던 다른 작품들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이다. 사실 바로 이런 점이 20퍼센트라는 어마어마한 시청률을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여자아이들은 물론이고 남자아이들 또한 거부감 없이 〈천사소녀 네티〉를 보곤 했으니.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천사소녀 네티〉를 떠올리면 약간 느긋한 마음이 된다. 그 유명한 오프닝 음악처럼, 반짝반짝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지금 보면 로망의 ‘집약체’ 혹은 ‘극대화’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이 꿈꾸었던 ‘유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만화영화였으니까. 폴리아 시(市)라는 이국적인 이름의 유럽풍 마을과 그 마을의 중심에 있는 카톨릭계 학교, 성당과 새하얀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들, 가슴께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교복과 세트인 베레모 등….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볼 때와 비슷한 감상이었던 것 같다. 다만 세일러 문을 볼 때엔 그 속에 담긴 일상과 비일상을 모두 동경했다면, 이 작품을 보면서는 철저히 일상 부분만 동경했다. 소규모로 움직이는 괴도보단 동료 여러 명과 함께하는 전사가 되고 싶었던 걸까, 나.


여하튼 〈천사소녀 네티〉는 여러 모로 내게 각별한 만화다. 내 인생의 첫 만화방과 첫 만화책을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니까. 사촌 언니를 따라 갔던 만화방, 낯선 만화책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아는 제목이라 골라 들었던 책이 바로 〈천사소녀 네티〉의 원작 만화 『괴도 세인트테일』이었다. 이 작품을 그린 이는 만화가 다치바나 메구미(立川恵)인데, 후일 만화잡지 《밍크》를 사 모으던 나는 이 이름을 〈몽환전설〉*이라는 작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스토리 전개를 선보였던 〈몽환전설〉은 〈천사소녀 네티〉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주변에서《밍크》를 보던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끌었다. 그 후 다치바나 메구미는 나에게 ‘믿고 보는 만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클릭! 밍크』**라는 단행본 이후로 다치바나 메구미란 이름은 당최 보이질 않는다. 알아보니 〈클릭! 밍크〉를 연재하는 동안 연재처였던 잡지 《나카요시(なかよし)》***의 편집 정책이 변경되었는데, 그 바람에 작가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연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2003년에는 반강제적으로 《나카요시》에서 하차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가족 간병을 위해 모든 활동을 완전히 접었다고 한다…. 그나마 개인 홈페이지(https://note.com/megu22/)에 작품들을 아카이빙하고 있다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만화가가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는데, 그것도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정 때문이라니. 다소 입맛이 쓰다. 


그나저나 나는 〈천사소녀 네티〉의 세인트코롱 오르골을 아직 받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4월 초에야 펀딩이 마감되었다. 안내받은 바에 따르면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쯤 오르골의 금형을 제작하고 있을 것이다. 배송은 8월에 이루어진다고 하니 이 모든 원고들이 하나의 책으로 묶일 때쯤에야 직접 만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내가 이 글에다 무어라고 덧붙이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즈음 원작 만화가 다치바나 메구미의 새로운 활동 소식까지 들려오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원제는 〈몽환전설 다카마가하라夢幻伝説 タカマガハラ〉이다.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다카마가하라’는 일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공간이라 한다. 


**표기는 〈전영소녀☆Mink電脳少女☆Mink〉지만 읽을 때엔 ‘사이버 아이돌 밍크’라고 읽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시대를 뛰어넘었으나 시대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불운한 명작이라 평가하고 있다.


***일본의 3대 순정만화 잡지 중 하나. 〈괴도 세인트테일〉은 물론이고 〈카드캡터 사쿠라〉, 〈캐릭캐릭 체인지〉, 〈슈가슈가 룬〉, 〈캔디 캔디〉 등 우리가 대중적으로 알고 있는 많은 순정만화가 이 잡지에서 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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