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루카 외 1인 저, <실험의 힘>에 대한 서평
이 책을 읽은 후 떠오른 문장 하나. “이제는 연역이 아닌 귀납의 시대다.”
테크 분야부터 교육과 정부 기관까지 여러 영역에서 실험이 실행되고 있다. 공공 분야와 민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팀이 의사결정에 앞서 실험을 활용했다. 바야흐로 실험혁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이런 흐름에는 다음의 3가지 핵심 특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기록의 디지털화와 온라인 플랫폼의 지속적인 확대로 예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둘째, 온라인 플랫폼 덕분에 무작위 추출이 더 쉬워졌고 비용도 줄었다. 테크 기업은 대조군을 두는 게 표준적인 운행 방식이다. 무작위 추출에 어떤 단추를 클릭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도 않는다.
셋째, 행동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지극히 작은 변화가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인간의 직관에는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 따라서 실험을 통해, 직관이 증거로 보완될 수 있다.
- <실험의 힘>, 281~282면.
그런데 나는 아직 귀납의 시대가 아닌 연역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에겐 많은 실험군, 대조군이 없다. 오로지 내가 담당하고 있는 몇몇 사건들이 있을 뿐. 분야도 내용도 사실관계도 맥락도 전부 다른 사건들이기에, 무언가 실험을 시도할 여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특정 편향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특정 실험으로 평균 회귀를 나타내는 편향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분야. 이는 기본적으로 많은 고객 혹은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분야이다. 가령 플랫폼 기업들은 일정한 변수를 설정한 후, 수많은 이용자들의 반응을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로 담당하고 있는 업무인 소송은 그렇지 못하다.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아직 귀납보다는 연역의 영역이다. 법이라는 대전제가 있다.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학계의 논의와 재판례들이 있다. 이러한 자료들, 그리고 분석한 사실관계를 가지고 밑에서부터 논리를 하나하나 쌓아나간다.
변수, 관찰 및 실험과 같은 개념보다는 ‘당위’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영역이다. 일단 어떤 가치가 옳다고 선언되면 그에 기초하여 모든 법적 판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절대적인 당위는 없다. 가치는 변화하기 마련이고 충돌하기 마련이다. 명예훼손과 모욕에 대한 법적 판단은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와 피해자의 인격권이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영역에서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이루어진다. 가치의 변화에 따라 팽팽하던 양쪽 가치의 균형이 깨질 경우, ‘사실적시 명예훼손’ 같은 범죄는 추후 비범죄화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당위의 부재를, 귀납적인 실험으로, 데이터로 보완할 수 있을까? 미래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보여진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전에는 옳았던 것이 지금은 옳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한다. (귀납적 실험에 기초한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범죄였던 간통죄를 지금은 범죄가 아닌 것이라고 ‘위헌결정’을 한 것처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9846.html
어떠한 법을 개정하거나, 그 법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때 근거로 흔히 사용되는 것이 ‘국민의 법감정 변화’이다. 지금까지는 국민의 법감정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주장할 때 그 근거로 추상적인 레토릭이 득세할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무수히 많은 분야에서 실험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시대에서는, 국민의 법감정 변화도 ‘실험’을 통해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귀납의 시대를 맞이한, 그러나 아직 연역의 시대에 살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 이런저런 단상의 계기를 던져준 책이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983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