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직업의 관계에 대하여
오랜만에 쓰는 브런치 원고 앞에서 뇌정지가 왔다. 스스로를 ’ 읽고 쓰는 사람‘으로 정의해 오며, 책을 읽고 브런치에 많은 글거리를 저장해 두었지만 막상 업로드할 글을 쓰려니 손가락이 굳어가는 것 같았다. 역시 잘 쓴 글이 아니더라도 자주 그리고 꾸준히 올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제 작품을 판매할 거예요’ 라며, 매주 한 번 도예수업을 가시던 맨몸운동 선생님이 1년 남짓한 사이에 정말로 찻잔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판매하시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지기 시작했다.
결론: 앞으로는 매주 1편의 컨텐츠를 올리도록 해볼게요~
보통 파일럿의 삶은 어때요?
근황으로 시작해 볼까요?
그동안 저는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책과 글을 읽고 명상도 하고 운동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노력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를 탐구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어디 먼 곳으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저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지금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앞으로를 바라보는 내면여행이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보다는 새로운 집과 동네, 그리고 새로운 집단에서 스스로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 역시 고민과 단념을 반복하며 조금씩 방향을 잡아간 것 같아요.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던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독서모임, 봉사활동, 강의, 운동센터 등 여러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조종사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되고, 이러저러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마치 소개팅이나 인터뷰처럼요. 그 질문들은 보통의 파일럿~로 시작 되었습니다
해외 많이 다니시겠어요.
주로 어디로 비행 다니세요?
공항으로 출근하는 기분은 어때요?
매일 출근이 두근거릴 것 같아요.
파일럿들은 비행기표가 공짜인가요?
승무원들이랑 친하게 지내시겠어요.
어릴 때부터 꿈이었나요?
저는 비행기를 너무 무서워하는데, 안 무서우세요?
Just One of Them
나는 지금 조종사 중 한 명에 불과하구나
어느 순간부터 제 자신이 희미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과 얕고 넓은 관계가 이어질수록 대화 속 등장인물은 제가 아닌 보통의 조종사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직업에 궁금한 것은 잘못이 아닌데, 분명 관심은 좋은 건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지루함과 무기력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카레 같은데?
어떤 음식이든 카레가루 한 스푼만 넣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원래의 맛은 희미해지고 카레 맛이 나거든요. 아주 강력하게. 향은 물론이고 색깔도 조금은 노랗게 변합니다. 많이 넣을수록 재료 본연의 맛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렇게 점점 카레가 되어 갑니다. 카레가루는 어떤 음식에. 들어가도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재료입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간 음식이든 카레 맛이 가장 먼저 미각을 강타합니다. 카레의 맛과 향이 당연해질 만큼 익숙해져야 서서히 원래 재료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조종사가 된 것이 제 삶에 카레가루 몇 스푼이 뿌려진 느낌이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희미해지고 조종사라는 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제일 먼저 각인되는 것 같았어요. 이름, 나이, 취미, 취향, 사는 곳 다 떠나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대화는 비행과, 공항, 여행, 해외, 비행에 대한 감정 등 제 직업과 연관된 주제로 대화가 이어집니다. 카레 맛에 익숙해질 만큼 궁금증이 해소되면 원래 재료의 맛이 느껴질 때 즈음 비행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고 다른 대화가 이어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직업과 나의 관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면 삶의 중심이 이동하게 됩니다. 책임이 따라오니까요. 내 마음대로 완전히 ‘나’ 자체로 살기는 어려워집니다. 규칙과 문화, 직업과 직장이 부여하는 상식 범위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공무원이셨던 제 아버지는 ’ 공직자는~‘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거든요. 게다가 일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 살게 된다면 생활방식과 행동 말투 심지어 생각까지 바뀌기도 합니다. 인프라가 밀집해 한 동네에서 모든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대도시에 있다면 1시간 정도 이동하는 것이 ’ 멀다 ‘ 고 느껴질지 몰라도, 지방 소도시에서는 ‘안 먼데? 가자’라고 할 법한 거리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직업은 저의 생각과 행동, 말투, 생활모습을 많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업이 정해주는 대로 살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 자체로 행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업무가 없어도 퇴근 시간이 되면 집에 가고 싶은 것이 그 증거고, 직장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워라밸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고요. 직업이 정해주는 대로가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진짜 나의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들어본 기장님들의 비행 밖의 모습은 정말 다양했거든요. 성격도 취미도, 취향 마저도요. 그리고 거기에는 더 좋은 모습도 더 나쁜 모습도 없습니다. 그냥 비행이라는 카레가루를 가진 다양한 기장님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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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인 대하기
나의 직업은 나에게 일정 기간 동안 부여된 역할이지 ‘나’가 아니다.
책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by 루퍼트 스파이라 중
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수많은 명상가들이 이야기하듯 우리 삶이 유한합니다. 그리고 그전에 대부분의 직업도 유한합니다. 저에게 비행도 그런 존재입니다. 그리고 제 삶에서 비행을 제외하더라도 수많은 자아가 존재합니다. 요가하는 파일럿에서 파일럿을 제외해도 저는 요가를 하는 사람이고, 글쓰기와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 그리고 또 다른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고 해요. 마치 카레가루를 넣더라도 원래 재료의 맛을 해치지 않을 만큼의 비율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보는 저의 시선에서도 균형을 잡으려고 해요. 저 역시 직장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저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습니다. 이 사람의 일과 관련된 질문들도 많이 하게 되고, 저와 다른 삶의 역할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호기심에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지만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본모습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이름도 많이 말하고, 속으로는 이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떤 카레가루가 들어와도 변하지 않을 진짜 ㅇㅇ님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분들이 읽어주셔서가 아니라 독자님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