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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만드는 희희 Nov 27. 2020

내 인생을 편집하는 편집자

편집edit의 힘

한 출판사의 면접을 앞두고 그 회사에 다니던 지인이 대대로 이어오는 질문 몇 개를 흘려주었다. 그중 사장이 중요시하는 출제율 100퍼 질문은 이것.


"존경하는 사람, 혹은 롤모델이 누구인가?"

 

롤모델이라.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다급히 찾기 시작했다. 처음 떠오른 사람은 스티브 잡스. 무난하지만, 너무 거창하다. 당시 주목받던 성공한 여성 기업인들도 후보였는데 그들의 성공과 내 성공의 정의가 달랐다. 역시 정답은 부모님인가... 했지만, 그렇게 답한다면 위장취업이나 다름없었다.

이렇다 할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생각나는 이름들을 노트에 적어보았다. 이름 하나마다 짤막한 순간들이 스쳤다.


-까마득한 막내 편집자인 내게도 항상 존대하며 차근차근 의견을 묻던 선배 1,

-밴딩 된 새 책이 회사에 도착하면 아이처럼 달려와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며 매만지던 선배 2,

-일이라는 것은 결국 문제해결의 과정이므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건 '일'일뿐이라는 걸 알려준 선배 3,

-책은 상품이고 편집자는 그 상품을 만드는 PM이라며 기존의 프레임을 변환해준 선배 4,

-본인 일도 산더미인데 내가 본 교정지를 두고 과외선생님처럼 하나씩 짚어주며 설명해주던 선배 5,

-기획안을 쓰다가 생각이 막혀 점심시간에도 모니터 앞에서 낑낑대던 날. 너덜거리는 나를 성미산으로 데려가 산책하며 생각 끊는 법에 대해 말해준 선배 6


노트에 여러 이름을 차곡차곡 써내려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롤모델이 꼭 한 사람이어야만 하나?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본받을 만한 조각들을 떼내어 내가 지향하는 모습으로 편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심지어 나는 편집 전문가 아닌가.


면접 당일, 예상대로 질문이 나왔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나에겐 이러저러한 롤모델이 여러 명 있다고. 사장이 비웃으며 되받아쳤다.

"아니, 롤모델을 짜깁기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짜깁기라기보다 이것 또한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면접 결과는 합격이었고, 회사에서 입사를 서두르는 통에 면접 다음 주에 바로 출근했다가 얼마 다니지 못하고는 빠르게 퇴사해버렸다. 이유는? 아무리 찾아봐도, 악마의 편집급으로 왜곡해 보려고 해도, 롤모델로 편집할 만한 면을 가진 사람이 회사에 없었다. 그땐 그게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얻은 것도 있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아, 저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저런 태도 되게 멋없다 같은 '반면교사' 항목들을 수집한 것. 덕분에 롤모델이 아주 입체적으로 편집되었다.


나름대로 열정이고 애정이었던 행동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뒷전이 됐고,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선배들의 몇몇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하기도 한다. 참 재수 없다.  (어떤 후배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절대 배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꼭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근데 두고는 보겠다. 너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_박정민, <쓸만한 인간>(상상출판, 2019)



편집에는 힘이 있다

편집자들과 만나는 행사 Q&A 코너의 단골 질문(혹은 고민)도 롤모델이다. 회사 내에 롤모델로 삼을 사람이 없다, 정확히는 이 회사에서 닮고 싶은 선배가 없다는 것.

어쩌면 닮고 싶은 면모를 두루 갖춘 롤모델을 '우리' 회사 내에서 찾겠다는 건 욕심이자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고, 게다가 함께 일하면 그 단점이 아주 잘 보일 수밖에 없다. 의견이 갈리고, 감정이 부딪치고, 실망하는 순간도 있을 테다. 함께 일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이렇게 짜고 매운 관계에서 롤모델을 만난다는 건, 대박급 행운이 따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전 세계 수많은 이의 롤모델인 잡스 님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기피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회사 내에서 롤모델을 찾을 수 없다는 고민에 내 대답은 늘 같다.

 회사에서 찾지 마세요. 바깥을 보고, 출판계 더 바깥까지 보세요. 완벽한 한 사람의 롤모델이 아니라, 여럿에게서 내가 닮고 싶은 면면을 수집해 '편집'하세요. 반면교사도 잊지 마시고요. 그리고 나는 어떤 편집자가 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세요. 그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나 자신부터 생각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편집이 단순한 짜깁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하고, 발견하고, '관점'을 가지고 잇고 조립하는 능동적인 과정. 바로 이 관점을 갖기 위해 나부터 생각해보자는 거다. 게다가 우리는 롤모델 편집뿐 아니라 매일 자신의 삶을 편집하며 살고 있으니까.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과 감정, 생각으로 숨겨진 문장과 단어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어 이야기를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_  아날로그 키퍼 웹페이지에서 발췌


책 만드는 편집자 이전에 나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편집자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라는 편집자의 관점으로 내 삶을 보자는 다짐 같은 것.

그 관점이 있다면 '그저 내게 일어난 일'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무기력한 '그저'가 아니라, 내 인생이라는 책을 편집하기 위한 한 조각이 될 수 있으니까. 또는 그 관점에 따라 내가 어떤 경험을 할지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은 온전히 나라는 편집자의 선택으로 결정된다. 이만큼 편집권이 자유로운 편집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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