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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만드는 희희 May 31. 2021

작가님, 제발 저를 만나지 말아주세요

저자 미팅의 악몽 #1


예비 저자와의 첫 미팅이 잡히면 요즘도 떠오르는 날이 있다. 오래전 꼬꼬마 편집자이던 때였다. 연신 베스트셀러를 내던 저자를 가상 필자로 기획안을 쓴 적이 있다. 매주 버릇처럼 진행되던 기획회의를 위해 작성한 아무말잔치 기획안이었다. 회사는 그걸 덥석 물었다. 당장 연락해서 무조건 만나고 어떻게든 섭외하라는 미션.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획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베스트 저자면 뭐든 되는 거였다. 컨텍 이메일을 쓰며 기도했다. 제발 저를 만나지 말아주세요. 제발. 그런데 뭣 때문인지 그도 미팅 제안을 덥석 물었다. 저기요, 바쁜 분 아니셨어요? 대체 왜 만나자는 거죠?


(아마도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1)


평소 관심 있던 저자가 아니었기에 그제야 부랴부랴 책을 읽고, 기획안을 다듬었다. 어떻게든 잡아야 했다.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어른들 눈치 보느라 한동안 힘들 것 같았다. 무조건 설득하겠다 마음먹고 이 기획을 우리와 꼭 해야 하는 이유, 예상 질문, 대화 시나리오까지 짜고는 달달 외웠다. 그러면서도 약속이 취소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시간은 착실하게 지나갔고 약속한 그날이 왔다. 저자가 정한 약속 장소는 고급스러운 카페였다.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한 번 더 굳어버린 나. 하지만 그간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까! 미리 도착해 이미지 트레이닝까지 마치니 자신감까지 장착. 곧 도착한 저자를 앞에 두고 흡사 프레젠테이션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저희가 이러이러한 컨셉을 생각해봤는데, 이러저러해서 선생님만 쓰실 수 있는 책이고... 그래서... 블라블라... 그러니까... 블라블라... 저희가 잘 만들 수 있고.... 그러니 어떠신가요?!"

온 힘을 다해 준비했던 말들을 쏟아내자 찾아온 정적. 그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비슷한 기획으로 다른 출판사랑 작업하고 있어요.


(아마도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2: 김 주간님이 얼마 전 팀에 선물로 돌린 부산 소주)


네? 네? 빈틈없이 짠 시나리오에 이런 전개는 없었는데. 그 후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없다. 미팅은 겨우 30분을 채웠고 "다른 기획 있으시면 또 연락주세요" 하고 뒤돌아서는 저 사람을 평생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미팅이 길어진 척 둘러대고는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무능한 나를 데리고 낯선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물었다. 왜 아무 말도 못 한 거야.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뭐가 문제였지? 무능한 나는 역시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3: Sunny mary day @드로잉메리 작가님 전시)





2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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