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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Nov 28. 2023

K맘의 여행

보라카이에 도착한 삼일째 아침엔 조식을 혼자 먹었다.

남편의 게으름과 아들의 휴대폰 사랑은 여기서도 유효했기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들의 여행과 나의 여행이 조금 많이 다를 것 같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삼일째 날부터 확실해지고 있었다. 조식 먹으러 가자고 깨우다가 문득 '굳이? 내가 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버려 두고 나는 잠시라도 나의 여행을 하자 싶었다.


여정을 짜고 짐을 쌀 때까지 이 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차피 나뿐이었으며 이곳이 어디든 와이파이만 터지면 되는 아들과 흡연장소만 있으면 되는 남편이었다. 우린 여전히 다르고 각자 이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이 달랐기에(그들이 얻고 싶은 게 뭔지 내가 끝내 알아낼 수 있을까) 나는 우리의 여행을 적당히 단념하고 나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조식을 먹으러 혼자 나왔는데 그 순간 좀 행복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이거지. 내가 이러려고 여기 왔지.  


보라카이에 도착하고 3일째가 될 때까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닷속에서 홀로 니모를 마주했을 때와 조식을 먹으며 홀로 아침 햇살을 마주했을 때였다. 일어나지 않는 남편과 일어나자마자 왜 깨우냐며 짜증 내는 아들을 굳이 달래어가며 조식을 함께 먹자고 할 필요가 없겠구나, 다이빙을 배우러 가서까지 흡연 장소가 어디냐 물으며 사라져 버려 같이 체험하는 다른 팀까지 모두 기다리게 하는 남편과 무언가를 함께 하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조식을 먹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조식을 먹을 때 식기가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는 항상 좋았다. 어디서든 그 울림이 주는 설렘이 있다.

조식당은 야외였기에 아침부터 살짝 더운 열기가 퍼지고 있었는데 그게 꽤 맘에 들었다.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처럼 빛의 일렁임이 만져질 것만 같았다. 직원들의 정성스러운 인사와 친절한 미소, 식사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 낯선 언어들이 뒤섞여 두런거리는 소리 사이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울렸고 햇살이 바람 사이로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남편과 아들이 비행기를 타고 먼저 돌아가겠다고 해도 잡지 말아야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런 다짐을 했던 걸 보면 여행 준비 과정부터 지금까지 혼자 꽤 약이 많이 올랐다가, 어머? 사실 너네 없어도 그만이잖아? 싶었나 보다.


보라카이는 주로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오는 곳인 듯했다. 특히나 내가 4일 동안 묵고 있는 숙소 페어웨이즈엔 한국사람은 거의 없고 외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간 식당에서 혼자 조식을 먹고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모두가 일행과 함께 커피잔과 식기를 가볍게 부딪히며 아침햇살 속에서 미소를 주고받고 있었고 나만 혼자 조용히 맛없는(페어웨이즈는 조식이 맛없기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조식이 뭐 원래 다 그렇지 않나?) 음식을 먹고 있었기에 직원들과 옆테이블에서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나는 한국 엄마예요. 남편은 자고 있고 아들은 유튜브 보고 있지요. 원래 한국 엄마들은 혼자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화가 안 나요.'라는 말을 미소에 가득 담아 얼굴 위로 띄웠다.

돈워리. 암어케이. 암륄리햅삐 나우. ^^


결국, 아들의 컨디션 난조로 보라카이까지 와서 병원을 다녀왔고 예약해  호핑과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비쌌던 스파는 하지  했다. 일정을  취소하고 호텔방에서 새우탕면만 먹고 있다가 남편과는 신혼여행 때만큼이나 싸웠다. 어차피 아이는 처음부터 하기 싫어했고 어제 보니 남편도 딱히 흥미 있어하진 않는  같아, 게다가 여기까지 와서도 흡연장소만 찾아 헤매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여, 원래 계획된 일정을  혼자라도 하면  되겠냐? 돈이 아깝지 않냐?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졸지에 자식을 버리고 혼자 놀겠다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사실 아니라곤 하지  하겠지만... 조식은 혼자 먹으라 보내면서  호핑은 혼자  하는 건지, 호텔방에서  같이 우울한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하면  되나? 내가 꿈꾸던 곳인데  번쯤은  그래주면  되나? 우리가 싸우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겠지. (덕분에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한국에서도 도통 쓰지 않고 있던 글을 여기에 와서 쓰고 있다)

특별히 한 것도 없이 여정의 절반이 지나갔지만 아직 남은 일정이 꽤 있으니 남편과는 화해하고 이번 여행을 잘 마무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중인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너무나도 꿈꾸던 곳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이곳은 나의 상상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데 이 멋진 곳을 여전히 미숙한 채로 온 것이 문제인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꿈을 꾸며 왔던 것이 문제인가, 오늘 내내 그런 생각들을 했다. 어쨌든 이대로 여행을 망칠 순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오늘의 페어웨이즈 안에선 내가 가장 침울한 엄마였다. 조식을 먹으며 혼자 있을 때 빼곤 대부분의 순간이 그러했다. 남편과 싸우고 잠시 방에서 나와 수영장과 카페에 앉아 다른 가족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나 빼곤 다들 행복해 보였다. 역시 내가 K맘이라 그런 건가...

'맘'이란 단어에 스며있는 여성 비하 때문에 그 표현을 꽤 싫어하는데, 이곳에서 다양한 국적의 맘을 보았고 뭐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오직 K맘에게만 부여된 어떤 기능과 역할을 느꼈기에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K맘, K맘, 하고 있었다. 암튼, 그래봤자 결국 나는 K맘이다. 그 K맘이 가족과 함께 할 땐 대체로 화가 많은 편이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님을 내일부터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이제야?!)


나는 나의 여행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가족 여행을 온 것이고, K아빠와 K아들과 함께 여행을 온 K맘이니까 내가 K가족이며 K맘임을 잊지 말아야겠지. 언젠가는 K가족도 조금씩 변해가겠지. K맘도 함께 변해가겠지. 그저 이번 여행에서 조식정도는 혼자 먹으며, 그러다 눈치 봐서 중간에 한두 번 정도는 혼자 바다에 나가 멍하니 선셋도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나만의 여유와 행복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끼니를 거른 덕에 내일은 수영복이 몸에 좀 맞으려나, 하는 작지만 소중한 기대를 품고서 내일 아침의 보라카이 해를 맞이해야겠다.  


머리는 어느 부족의 족장 딸 머리를 하고 있지만 잠시 스칼렛 오히라에 빙의하며 외쳐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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