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아라빌리 Sep 13. 2024

인프제의 남편

엠비티아이에 대해선 꽤 오랫동안 관심 없이 지냈다. 각각의 알파벳들이 지닌 성격의 특성을 기억하기 힘들었고 이건가? 저건가? 그저 헷갈렸다. 게다가 테스트를 위한 질문이 너무 많아 재미삼아 해보다가도 이내 질리곤 했다. 유재석의 놀면 뭐 하니에서 I형과 E형을 다룬 후로  '아, 내가 I구나' 정도만 깨달았을 뿐 여전히 관심 가는 주제는 아니었기에, 누군가 엠비티아이를 이야기하면 잘 모른다고 대답하거나 그저 살짝 웃는 정도로만 반응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아주 좋아하며 그러한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쉽사리 지친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거나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귀가 저절로 닫히기도 한다. 타인의 비밀은 알고 싶지 않으며 나의 이야기 또한 속이고 싶진 않아도 굳이 먼저 알리고 싶지도 않다. '기 빨린다'는 말을 자주 하는 습관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많이 예민한 성격이라 그 뾰족함을 감추기 위해, 쉽게 날이 서지 않기 위해, 너무 몰입하여 나를 과하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얼굴 하나를 가면처럼 덮어쓴 채 주변과의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난 그냥 AB형인데... "라는 말을 자주 했으며 "아, 어쩐지......"라는 반응이 이어지곤 했기에, 대체 그 '어쩐지' 속에 담긴 나의 모습과 '......'으로 생략된 속내가 내심 궁금하긴 했지만, 사실 또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도 아니어서 상대가 '아, 어쩐지' 하는 눈빛을 보일라치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그 어쩐지.... 속의 AB형'이  아닌 척하며 살아가려 애를 쓰긴 했다.


얼마 전 사무실의 누군가가 엠비티아이 검사를 해보라며 어떤 사이트의 링크를 보내줬고, 이번엔 내 성격의 카테고리가 진짜로 궁금하기도 하여 성실하게 검사에 임했다. 내 성격은 INFJ. 인프제라고 불리는 거 같았다.

'나 AB형이야'라고 했을 때는 나의 이런저런 성향들(혼자 있고 싶어 하고,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 친한 것 같고, 속내를 모르겠고, 감정기복 심한 거 보니 살짝 사이코 같고, 가끔은 괜히 착한 척하는 것도 같아서 좀 재수 없고... 등등, 사실 이건 거의 내 남편의 의견인데 나도 그럭저럭 동의하고 있다)이 그저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래. 음... 내 생각엔 그냥 쟤는 쫌 똘아이야."라는 말로 퉁쳐지는 거 같았는데, '나 인프제야.'라고 하는 순간 성격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여 살짝 안심이 되었다.

오호, 엠비티아이, 이 친구 좀 맘에 드는데?



재빨리 네이버 창을 열어 인프제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 보았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 인프제는 기본적으로 친절하며 둥글둥글 잘 맞춰주는 편인데 그건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다.

- 나는 뭐든(어떤 성격이든)될 수 있다.

-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개인적인 바운더리가 철저한 매우 사적인 유형이다.

- 소리 없는 손절을 잘한다.

- 눈치 없는 척 하지만 사실은 다 눈치채고 있다.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 난데? 내가 그런데?


밖에선 가면 몇 개를 돌려가며 뒤집어쓰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제대로 된 숨을 몰아쉬며 맨 얼굴을 드러낸다. "오늘도 기가 다 빨렸어."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지친 표정으로 헐떡이는 나를 볼 때면, 남편은 늘 '저런... 역시 AB형들이란..... 쯧쯧'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하는데 비록 그런(?) 남편이지만 그 앞에선 어떠한 모습의 나라도 안심이 된다. 나를 숨김없이 펼쳐놓아도 괜찮은 곳이라 나는 늘 남편 앞에선 무장해제다. 친구가 거의 없음에도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남편이 있기에 이미 충분해서 그런 거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인프제였다. 나에게서 그러한 성격의 특징을 읽어내며 그럴듯한 포장지를 벗겨내니 실은 나는 그저 은둔자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꽤 오랫동안 외로웠던 것 같고 그 외로움을 덜어내기 위해 나의 본성과는 다른 유형의 사람을 흉내내며 발버둥 쳤던 것도 같다. 이제야 은둔자로서의 나를 받아들인 채 "오케이! 나는 AB형이야. 아! 아니, 아니, 인프제야." 라며 속삭이고 있는데 그럼에도 감정적으론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평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졌고 그러한 생각의 꼬리들을 따라가다 보니 올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의 어느 순간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주말에 남편과 쌀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도깨비 OST가 흐르고 있었다. 에일리가 부르는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였다. 들을 때마다 항상 감탄하는 곡으로 "이 노래는 제목부터가 그냥 시야, 시!" 하며 매번 두 손을 꼭 모은다. 이 노래의 킬링파트라고 해야 하나. 기어이 울컥하고야 마는 구절이 있는데 마침 딱 그 부분이 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남편한테 쏟아내듯 말했다.

있잖아, 나는 이 노래에서, 욕심이 생겼다~ 너와 함께 살고 늙어가 주름진 손을 맞잡고 내 삶은 따뜻했었다고, 이 부분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한다?! 나중에 늙으면 너보다 딱 일주일 더 살아서 너를 잘 보내고 떠나야지,라는 생각. 좀 이상하지만 암튼 이 노래 들을 때면 꼭 그런 생각을 해. 너는 나 없인 못 살 것이 뻔하니까 내가 너보다 딱 일주일 더 살다가 너 보내고 정리한 다음 따라가야지.


며칠 동안 지루한 비가 이어져 잔뜩 그늘진 날이었는데 그날은 모처럼 해가 반짝였다. 밖이 환하길래 하늘을 바라보다가 지난번에 가려던 쌀국숫집에나 가볼까? 하며 남편과 집을 나섰다. 언젠가 식당 입구에 서서 문을 열자마자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그대로 돌아서야만 했던 곳이었는데 그날은 무사히 주문까지 마쳤다.

드디어 와보네.

쌀국수도 맛있고, 날씨도 좋고, 오늘은 성공이구만.

감정의 상승과 하락의 이유가 아주 사소하며 그 사소함에 비해 등락의 폭은 꽤나 상당한 나는, 이번에도 고작 그 정도에 아주 들뜨고 말았다. 여유로운 포만감과 나른해진 햇살에 잠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불쑥 생의 정리를 이야기를 하기엔 적절하지 못 한 타이밍이었으려나. 도깨비가 지닌 서사에 젖어 나도 모르게 맥락에도 없는 말을 던져 놓곤 잠시 갸웃거렸다. 그치만 남편을 살펴보니 역시 이런 일엔 익숙한 것인지 이번에도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눈시울이 붉어져 가고 있었다.

가끔 보면 얘는 나보다 더 감정선이 오락가락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래, 대신 다음 생엔 내가 꼭 부자로 태어날게."라는 말도 이어진다.

이런 말을 할 때의 남편 목소리는 항상 조금 흔들리는데 이제는 그 미세한 떨림 속에 담긴 마음과 시간이 무언지 알아서 얼른 우스개 소리를 쏟아내었다.

부자 아니라도 되니까 사고만 치지 마. 다음 생엔 내가 먼저 사고 칠 거야.

남편이 피식 웃었고 에일리의 노래는 거의 끝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안심이 되면서 조금은 행복해져 "졸리구만. 집에 가서 낮잠 자야지."라는 말을 하며 이제는 침구와 세탁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인프제였구나, 아... 그게 그래서였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많고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분한 이유에 남편이 있음을 깨닫으며 닿았던 순간이 왜 하필 그 순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런 찰나들의 이어짐 속에서 외로움이 덜어지는 사람이며 남편은 그런 내게 꼭 맞는 퍼즐 조각처럼 존재하고 있으니, 나는 인프제 중에서도 꽤나 명랑한 인프제, 진실로 뭐든 될 수 있는 인프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우리의 점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