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의 대화

by 날아라빌리

병원에서 대기하다 보면 약만 받아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접수하면서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한다. 어째서 나는 안되고, 저 사람은 되는지 물어보려다가 따지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관뒀다. 기다리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항상 좀 이랬다. 아니, 따지는 사람처럼 보이면 좀 어때서 말이야. 늘, ~~ 같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하지 않는 것들이 많은 편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나 인격보다는 그래도 조금쯤은 그럴듯한 사람인 척하고 싶어서 '~할까 봐'를 불안해하며 '결국, 내가 ~했는지'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한테 이런 증상이 자주 나타나요,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는 그렇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데 사람 자체가 부족함이 많아 '완벽하고 싶은 나'와 '완벽하지 못한 나' 사이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한심해했다. 좀 대충대충 하고 싶어 하든지, 그게 아니면 차라리 뭐라도 좀 잘하든지. 언제나 그 사이 놓인 어떤 애매함 속에서 서성였고 그곳엔 늘 일정한 분노와 실망이 고여 있었다.


대기실에선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다. 기다리는 것 외엔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가만히 앉아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그러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다시 어깨를 낮춘다.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집 근처 병원을 선택했는데 동네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봐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고개를 숙여 휴대폰만 보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 두 명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들어가 줄까?

아니, 혼자 들어갈 수 있어.

무슨 문제인지 정리해서 잘 말할 수 있겠어?

응, 해볼게.

한 사람은 끊임없이 괜찮으냐, 이런 데 오는 거 아무 일도 아니다, 누구나 다 온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조금도 괜찮지 않은 얼굴로 응! 괜찮아, 알아, 맞아, 이런 거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놓인 긴장감이 사뭇 팽팽하여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대화 내용이 자세히 들리진 않았다. 다들 고생들이 많구먼, 생각하며 세상 남일인 듯 바라보고 싶었지만, 딱히 남일은 아니었기에 그들 사이의 긴장감에 나까지 호흡이 가빠오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아들과도 이렇게 대기실에서 기다리곤 했다. 아들은 자기가 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았기에 조금 불안해하며 주눅 들어 있었다. "엄마, 쟤는 꼭 금쪽이 같아."라고 했다가, "나도...... 그래서 여기 온 거야?"라고 했었다. 손을 꼭 잡으며 넌 아니야,라고 했었는데, 나 역시 그때의 아들처럼 여긴 꼭 금쪽 상담소 같구먼, 이라고 했다가, 그렇지만 난 아니야,라고도 해 본다. 언젠가는 이곳에 앉아서 뒤를 돌아보며 내가 서성였던 시간들과 그 속에 고여있던 감정을 더듬던 시간들이 별일 아닌 에피소드처럼 느껴질 수 있을까? 우리 아들이 "엄마, 우리 그때 좀 머쓱타드..." 이러는 것처럼.


아아, 그러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선생님과의 상담이 필요하다기에 그렇게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선생님은 항상 질문을 하신다. 대게 아주아주 넓고 광활한 질문을 던진다.

숨이 왜 안 쉬어질까요?

스트레스가 있나요?

그런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땐, 이거 이거..... 뭔가 점쟁이 화법인데? 싶었다.

'이런, 내가 척 보면 알지. 너 무슨 문제가 있구나?'

'헉 어떻게 알았어요?' 하며 깜짝 놀라 주절주절 나도 모르게 털어놓게 되면서 점쟁이가 찍어 맞춰야 할 범위를 본의 아니게 좁혀주는... 그런 식.


오늘도 선생님이 물으셨다. 요즘 어때요?

선생님의 질문을 받을 때면 뭔가...... 굉장히 넓은 들판이나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같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하늘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비나 눈이 내리듯, 혹은 꽃잎이나 낙엽이 날리듯 어떤 질문이 흩날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너무나도 광활하여 도리어 갇힌 듯한 느낌이 드는 그곳에서, 열린 곳도 아닌 닫힌 곳도 아닌 그곳에서 '응? 쟤가 여기 왜 있지?' 하며 놀라다가 어쩌면 이곳에서 나를 꺼내줄지도 모를 열쇠라도 발견한 것 마냥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는 질문을 잡아채어 손에 꼭 쥔다. 오늘은 '요즘 어때요'다.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요즘 어때?라고 묻는다면 좋지,라고 하거나 아, 요즘 별로, 사무실 사람 누구가 좀 짜증 나, 정도의 이야기를 할 테지. 요즘 어때는 밥 한번 먹자 정도의 통상어라서 특별한 의미가 없으니 나 또한 대충 적당한 대답을 하고 말 텐데, 선생님의 요즘 어때는 몹시도 광활한데 이상하게 밀도가 높다. 나의 요즘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가며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요즘의 어느 부분이지? 아침일까? 밤일까? 잘 자는지를 묻는 걸까? 호흡을 말하는 걸까? 대화를 말하나? 어디에서의 요즘이지? 집? 사무실? 친구들과의 관계? 그렇게 좋아하던 수영을 못 하게 된 것도 요즘에 들어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요즘일까. 한참 동안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요즘은... 화가 안 나요."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요즘 화를 안 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요즘 정말로 화가 나지 않는다.

나의 작은 컵이 주변의 자극으로 가득 채워져 아주 사소한 대화조차 처리할 여유가 없었는데, 선생님 말씀대로 약이 그 속에 든 물을 퍼내주고 있는 것인지 나는 조금씩 찰랑거릴지 언정 넘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화가 안 난다는 건 무슨 의미죠?

선생님은 내게 사하라 사막 같은 질문을 던져놓고선 나는 촘촘하고 비좁은 골목 같은 대답을 하길 원하는 표정이었다. 이야, 저것도 정말 기술이구나. 감탄하며 이야기를 조금 더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원래는요, 여기 오기 전까진 너무 화가 났어요. 쟤는 왜 열심히 안 할까? 쟤가 열심히 안 하니까 내가 더 해야 하고, 나만 열심히 하는데 성과는 내 것이 아닐 때가 대부분이에요. 저는 그냥 쓸데없이 열심히 하는 애, 가끔은 독한 애, 당연히 할 줄 아는 애인데 사람들도 이제 그걸 다 알아서 슬쩍 저한테 다 미뤄요. 저는 억울하고요,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요. 나중에 나도 열심히 안 해야지, 결심하는데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열심히 하고 있는 저 때문에 다시 화가 나요. 그래서 자꾸만 화가 나고 이것도 화나고 저것도 화나고, 집에서도 청소는 나만 하고, 설거지도 나만 하는 것 같고, 돈도 나만 아껴 쓰고, 그냥... 전부 나만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누구도 나한테 그걸 하라고 한 사람은 없어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최선을 다하느라 너무 기를 쓰고 있는 스스로한테 화가 나요. 근데요, 그 최선이라는 게요... 사실은 무지하게 시시해서 남들은 그냥 너무 쉽게 하는 것들이에요. 저한테만 기를, 기~~를 써야 가능한 것들이라 그게 제일 화가 나요. 나는 기를 써야 가능한 건데 남들은 그냥 숨 쉬듯 하고 있어 화가 나요. 아니, 화가 났어요. 정말 사사건건 다 화가 났어요. 신호등 안 지키는 사람을 봐도 정말이지 화가 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아니 진짜로 숨이 막혔는데, 지금은 화가 안 나요. 그냥,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요.


선생님은 사막 위를 비행하는 비행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좁디좁은 골목에서 머나먼 저쪽 하늘 위의 비행사를 상상하듯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제가 먹고 있는 약이 뭐죠? 약 때문인가요?

항불안제예요. 아마도 컵이 가득 차버렸을 테고 감정을 정리할 에너지가 없었을 거예요. 화가 나고 억울했던 것은 불안이라는 감정이 분노로 전이되었던 것인데, 그 불안이 가라앉으니 화가 나지 않는 거예요. 한번 화가 나기 시작하면 칙칙폭폭 달려가서 제어가 잘 안 되고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되는데, 화가 가라앉으면서 이전의 모습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전이라면 어느 이전이요? 약 먹기 전? 아니면 숨이 잘 안 쉬어졌던 이전? 아니면 자주 화가 난다고 생각했던 언젠가의 이전?

묻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여전히 사막 위에 계셔서 더 이상 묻질 못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씀하셨는데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엔 녹음을 좀 해야 하나, 생각했다. 아무튼 선생님과의 대화는 너무 광활해서 오히려 나와 대화를 하는 기분이라 나쁘진 않다. 나의 요즘이 어떤지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처음이나 두 번째보단 훨씬 공손한 몸짓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다음엔 안 뵙고 싶지만, 병원엔 정말이지 안 오고 싶지만, 또 와서 다음에 또 뵈어야겠지. 선생님 다음엔 좀 가까운 하늘 위에 있어주세요. 너무 멀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어차피 답은 내 안에 있을 테니까.


화가 나지 않고 아무 감정이 없다. 가식으로 가득한 웃음이겠지만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다. 우선은 여기까지. 아니, 여기서부터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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