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구매 관리
EPC 중 가장 적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구매
"네, 윤성지입니다."
"성지야, 뭐 해?"
설계 담당하는 이번영 차장님의 전화였다.
"아, 벤더한테 메일 쓰고 있었죠."
"걔들은 아무리 메일 써도 소용없을 거야. 이거 회사차원에서 대응해야 애들이 움직일 것 같은데..."
"일단 공무부장님께 보고는 했으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그래. 이제까지 메일을 몇 통이나 보냈지?"
"한 달 전부터 보냈어요. 답변받을 때까지 써 보려고요."
"그래. 수고해. 뭐 내쪽에서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으면 알려줘."
"네. 고생하세요."
해외 EPC 프로젝트에서 HVAC 장비는 보통 현지 제작사에게 구매한다. 발주처의 시방서(Project Specification)에 현지에 지점이 있어서 A/S를 제공할 수 있는 제작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도 중동에 있는 제작사를 선정했는데, 문제는 납품한 HVAC Control Panel에 프로그램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작사에서는 계약상 프로그램이 없는 것은 문제가 없고, Supervisor를 보내서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작성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
“임 부장님, 혹시 Vendor가 어제 보낸 메일 보셨나요?”
“응. 근데 이 자식들 무슨 이야기하는 거야?”
“요약하면, 프로그램 작성을 공장에서 해야 한다는 조항이 계약서에 없다는 거예요. Supervisor를 보내서 현장에서 프로그램작업을 하겠다는 거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우리 Supervisor 비용이 하루에 얼마야?"
"USD로 800불입니다."
"하루에 800불 받고 프로그램을 작성하겠다는 거야? 이런 미친놈들이네. 그래서 구매담당자는 뭐라고 이야기해?”
“벌써 여러 번 메일도 쓰고, 통화도 했는데 안 통한데요. 이거 프로젝트 차원에서 대책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렇지. 우리 HVAC 시운전 일정이 언제야?"
“빠르면 앞으로 2달 후에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윤 과장이 봤을 때 프로그램 작성하는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Supervisor 실력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15개 건물용 프로그램 작성에 한 달 반은 걸릴 것 같습니다."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네. 소장님께 내가 보고드릴 게. 윤 과장은 계속 e-mail로 독촉해 봐. 나중에 법적분쟁으로 갈 때 증거로 사용해야 하니까, 중간중간에 저장해 두고”
"네, 알겠습니다."
구매의 기초가 되는 문서는 계약서와 MR (Material Requisition)이다. 일반적으로 계약서는 회사의 표준계약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계약서 변경이 필요할 때는 회사 법무팀에서 검토하기 때문에, 시공 엔지니어가 계약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MR은 기술적으로 필요한 모든 문서, Vendor (장비 및 장치 제작사)가 납품해야 할 품목, 납품 전이나 후에 Vendor가 수행해야 할 테스트 등을 명시하고 있는 문서로 해외 EPC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Vendor 관리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문서로, 시공 엔지니어가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MR에는 Vendor Data (혹은 Vendor Print)의 종류 및 제출해야 할 날짜가 명시되어 있다. 계약 후 몇 주부터 계약이 끝날 때까지 Vendor가 제출해야 할 모든 문서들에 대한 목록이 보통 MR에 표시되어 있다. 또 납품해야 할 장비 및 자재와 관련 부자재 (Loose Item)들에 대해서도 명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냉동기 (Chiller)는 냉수 및 냉매 배관에 물이 흐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Flow Switch 신호가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Flow Switch처럼 냉동기와 별도로 납품되는 품목들이 바로 부자재이다.
MR은 계약서의 한 종류로 인정을 받는 문서이므로, 시공 엔지니어는 MR에 명시된 부분에 대해서 Vendor에 요구할 수 있다. MR에 명시된 문서를 MR에 명시된 기간 내에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MR에 명시된 Loose Item에 대해 Vendor에 납품을 요청하더라도 Vendor는 시행사에 추가 비용을 요청할 수 없다. 또 MR에 명시된 Test를 완료하지 않은 경우에는 Test 수행을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Supervisor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Supervisor의 파견을 요청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Supervisor의 숙소나 식사는 시행사가 제공하기도 한다.)
Vendor의 Supervisor는 보통 Daily Report에 매일 수행한 업무의 내용과 근무 시간을 표시한 다음에 시공사 담당자에게 확인 서명을 받는다. 이 서류는 나중에 Vendor가 시행사에 Supervisor 비용을 청구할 때 증빙으로 사용된다. 보통 Supervisor 1명을 사용하는 비용은 하루에 100만 원에서 400만 원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시공 엔지니어는 Vendor Supervisor가 매일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또 Supervisor가 현장에서 하릴없이 기다리지 않도록 작업계획을 잘 만들고, 관련된 작업허가서를 잘 준비해 둬야 한다.
해외 EPC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금액에 비해서 가장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구매 (Procurement)이다. 대개의 경우 구매는 본사의 구매 팀에서 관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현장에서 구매 업무를 담당하더라도 Vendor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준수해야 하는 요건들이 명시되어 있는 MR(Material Requisition)은 설계 엔지니어가 작서 및 발주처 승인을 담당하고, 시공 엔지니어는 Vendor와 Coordination 업무만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Vendor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HVAC 시공 엔지니어가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바로 구매라고 생각한다. 구매가 프로젝트에서 차지하는 비용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진행했던 해외 EPC 프로젝트의 HVAC 전체 비용의 50%가 구매에 관한 비용이었다. 하지만 구매를 신경 쓰고 담당하는 사람은 구매담당자, 품질담당자, 설게 담당자 등 시공 엔지니어를 포함해도 3~4명 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비율의 비용을 사용하는 공사는 시공사 및 시행사 인원들 등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관련된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적은 게 사실이다.
Vendor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할 때에는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내가 요구하는 사항이 계약에 의거한 내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Vendor가 나중에 추가로 돈을 요구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에피소드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프로그램 없이 납품한 HVAC Control Panel 때문에, 현장에서는 어떤 Test도 진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Control Panel의 내부 결선들 중에도 잘못된 것들이 많아서, 현장에서 시운전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Vendor는 계약 위반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했었다. 즉, 자신들은 잘못이 없으며,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장에 Supervisor가 상주해서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에도 하루에 USD 800를 Vendor에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약서 및 MR 등에 명시된 공장에서 완료해야 하는 Test 목록 및 FAT(Factory Acceptance Test)에 대한 요건들을 첨부하며 e-mail을 통해서 Supervisor 비용 없이 현장에서 Control Panel 수정 및 프로그램 작성을 요구했었다. 두 달의 길고 긴 e-mail을 통한 싸움을 통해서 Vendor는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고, Control Panel 수정과 Program 작성을 위해서 Supervisor 2명을 현장에 무상으로 파견 보내는 것으로 합의했다. (나는 총 4개월 동안 2명의 Supervisor 비용, 192,000 USD를 아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