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물박사 김민지 Oct 14. 2022

시인이고요, 에이전시인입니다

S#7 나는야 반납의 귀재

좋아하는 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절실해져야 열심히 하는 타입이다. 이렇게 태어난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회사일을 하고 있다. 시 쓰기에 비하면 현저하게 재미없지만, 이 일은 그럭저럭 내 적성에 맞는다. 울며 겨자 먹기에 소질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13일의 목요일이었다. 13일의 금요일도 아닌데 아침부터 사소한 불행이 지속됐다.


하나, 클라이언트의 사정에 따라 프로젝트 기한이 연기됨에 따라 한 달 전 이곳에서 처음 올린 연차 승인계를 지우고 휴일을 반납해야 했다.


둘,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제공한 기기 가운데 키보드와 마우스를 반납했다. 원래는 디자이너 한정 제공품인데 여유가 있어 기획자인 나에게 주었다가 신규 입사자가 늘어남에 따라 부득이하게 돌려달라는 메시지를 드리는 거라고 했다.


셋, 퇴근 무렵 저녁 7시 30분쯤 대표와의 회의가 있었다. 그동안 기획했던 촬영 기반 SNS 콘텐츠의 합의는 없던 것으로 하고 새로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는 그 견적에 그 정도 퀄리티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고심해서 쓴 연차부터 기획까지, 총 서너 가지를 연이어 반납하고 나서야 하루가 끝났다. 내 수중에는 그 정도 견적과 일정에는 작업하기 어렵겠다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답신, 조금 더 작업 비용을 올려달라는 카피라이터의 문자, 다시 또 다시를 말하는 대표와 클라이언트의 메아리만 남았다.


실무에 능통한 나도 가닥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환경에서의 적응을 장담하기 어렵다. 한동안 작은 조직에서 긴밀하고 빠르게 일하는 습관을 들여왔는데 이곳에 오니 마치 대감댁 별채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아니,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대.”


“아무래도 소식을 좀 기다려봐야겠는데.”


“그래도 우리가 대감님을 이렇게 맞이할 수는 없지!”


“대감님 표정이 좋지 않던데. 이대로 음식을 내어도 괜찮을까.”


“다음 식사를 위해 놀지 말고 저기 뒷산 가서 장작을 좀 더 구해 오는 게 어때.”


아무리 고객을 고객이라 부른다 한들, 자본 없이 노동으로 답하는 나 같은 에이전시인에게는 그 모든 부름이 주인의 오더 같다.


에이전시인으로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매일 아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퇴사를 지르자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근성으로는 무엇을 해도 안 되는 걸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이윽고 사옥에 발을 들인 뒤 자리에 앉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한다.


바쁘게 일을 하면서, 동시에 많은 생각을 증발시키는 평일. 내가 놓친 삶의 기류는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걸까. 내가 반납한 모든 것들의 비용이 매달 월급으로 환산되어 돌아온다. 테트리스에 등장하는 기다란 막대기 같은 월급을 매일 기다린다.


지난 금요일보다 일찍 들어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추신, 안녕하세요. 만물박사 김민지입니다. 파란 난초 상상은 지우고 이내 잘 적응하려다가 반납의 귀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연재에서 다른 때보다 오탈자가 많이 발견되는 건 제가 망가지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말은 눈치를 보거나 장작을 패거나 불을 지피는 일을 관두고 단풍 구경을 가려고 합니다. 체력이 허락해주기를. 오늘도 이렇게 좋은 날씨에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데 시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