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나이 네 살, 유아원에 다녔다.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은 더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곳. 어린 나이에 유아원에 가게 된 이유는 유치원에 입학한 오빠를 따라다니려고 떼를 쓰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부모님이 고민을 하던 중 두 명을 함께 보내면 일종의 할인을 받을 수 있었고 유치원에 간 오빠가 없으면 지루해하던 나를 위해 겸사겸사 보냈다고 한다.
"오빠랑 너랑 끝날 시간 즈음해서 아빠한테 너희 데려오라고 보내고 집 창문으로 오나 안 오나 내다보면 저기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아들은 맞는데 딸은 엄마 딸이 아닌 거여. 아침에 분명히 예쁜 원피스 입혀서 보냈는디 그건 어디 가고 뭔 시퍼런 체육복을 입은 애가 걸어오는 거 있지. 오메 추잡시라 죽겄어~ 자주 그랬어야. 푸하하"
오줌싸개. 바로 내가 우리 집에서 오줌을 가장 늦게 가린 장본인이다. 구체적으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엄마가 여러 번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사진도 있었다. "너 이때 바지에 오줌 질질 싸고 사진 찍었잖아. 기억나냐?” 하며 큰 웃음을 짜냈다.
사실 스스로도 그랬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 어딜 가나 불편했던 느낌은 기억이 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 표정이 늘 어둡다. 입꼬리가 쭉 내려가서 부르터 나와있다. 거의 모든 사진이 그렇다. 마찬가지로 그 사진들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오감이 곤두서 모든 게 다 불편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학교에 가면 나무 바닥 칠한 냄새, 실내화 고무 냄새, 도시락 가방에서 나던 미세한 음식 냄새, 겨울에 나던 난로 냄새, 우유갑에서 우유가 샌 냄새 등과 같이 일차적인 감각에서부터 나를 편치 않게 만들었다. 정말 싫었다. 싫었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표현할 다른 단어가 없다. 그냥 싫었다. 확실한 이유 같은 건 없다. 더럽다고 생각되는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중, 고등학생 때도 집이 아니면 화장실 가는 것을 꺼렸는데 초등학생 때는 오죽했을까. 학교에서 화장실을 하루에 한 번 이상 가는 일은 없었다. 집에 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렸다가 가면 좋지만 끝날 시간이 되어가는 마당에 줄곧 소변이 급해진다. 그런데도 최대한 참아내고 이를 꾹 물고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다시피 쏟아내기 직전에 집에 도착하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웬만하면 참고 참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가긴 가는데, 문제는 화장실 문도, 문을 잠그는 고리도 제대로 못 만지고 한 손가락 끝으로 겨우 건드린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곳을 나올 때면 손을 박박 씻어내고도 손 끝에 자꾸 소름이 돋았다. 그럼 한동안 아무것도 못 만지고 안절부절못했다.
할머니 집에 가는 게 싫었다. 할머니 집의 바닥은 짙은 회색의 문양이 그려진 바닥이었고 각 방의 문턱과 장판 사이에 큰 틈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내 발을 닿는 자체가 끔찍하게 싫어서 할머니 집에 가면 바닥에 편히 앉지를 못했다. 식탁 의자에만 겨우 앉아냈다. 벽에 기대는 것도 싫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멀뚱히 서있냐고 좀 앉으라고 한다. 그럼 나는 엄마 무릎에 비집고 들어가고 잠시 후 다리가 저리다고 나를 밀어낸다. 그럼 또다시 서서 쭈뼛쭈뼛 거 린다.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사촌들하고 놀 때면 함께 노는 건 신나고 좋은데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모든 일이 나에게는 감당해내야 하는 어떤 일이었다.
그렇게 불편했던 할머니 집에서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살게 된 적이 있었다. 이사를 가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이사를 가는 날엔 통곡을 했다. 한 번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그 시커먼 틈 사이에서 지네가 나왔는데 하필이면 나의 발가락 사이를 재빠르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날 나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데시벨을 송출해내고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그리고 절대 밟기 싫어하던 화장실 바닥 위를 슬리퍼 없이 그것도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서서 발을 벅벅 씻어야만 했다. 비누칠을 하고 또 하고 몇 번을 씻고 나와서도 이상한 느낌이 자꾸 나는 것 같고 그것이 내 몸에 왔다 갔다는 게 억울해서 꺽꺽 거리며 또 울었다. 그치지 않는 나를 이해 못한 할머니는 시끄럽다고 고함을 치셨고 서러워서 더 크게 울어 젖혔다. 그리고 옆에서 보다 못한 엄마는 그만 좀 하라고 다그쳤다.
"저놈의 가시네 유난떨고 자빠졌네"
엄마 말대로 나는 참 유난스러웠다.
예민한 미각 때문에, 음식에 대한 평가를 자주 했다. 실은 나쁜 의도 없이 단순히 느낀 것을 그대로 말했는데 매번 반복되다 보니 그것은 ‘투정’이었고 집이 아닌 밖에서는 경우에 없는, 완전히 ‘실례’를 범하는 일이었다. 습관이 되다 보니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 불만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예민한 후각 때문에, 형제들에게 툭하면 냄새난다고 짜증을 내고 핍박을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은 곧 싸움의 불씨가 되어 큰 불로 번졌다. 내가 원하고 예상했던 냄새가 아닌 다른 낯선 냄새가 내 코를 찌르면 그 순간부터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기 시작하며 신경이 곤두선다. 그럼 다른 식구들은 코를 킁킁 거리며 무슨 냄새가 난다는지 모르겠다며 눈총을 준다.
예민한 촉각 때문에, 웬만하면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만지지 못했다. 부모님을 며칠 동안 졸라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가 집에 온 지 며칠 만에 힘 없이 푹 쓰러져 있을 때 오빠 말을 듣고서 근처도 못 가고 멀치감치 떨어져 눈물을 찔끔 흘렸다. 살아서 콩콩 걸어 다닐 때도 이뻐 죽겠다고 하면서 만지지는 못했다.
생선이나 고기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구워지기 전에 날것에는 손도 못 댔다.
키우던 금붕어가 물 위로 떠오르는 날이면 즉각 귀를 막고 한바퀴 빙 돌고나서 눈을 손으로 가리고 멀치감치 서서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울상을 짓고 아빠가 그를 건져내기를 기다린다. 그럼 보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오빠는 아빠가 채로 건져 냈네, 아빠 손에 올려놨네, 그 붕어를 뭘로 감쌌네, 가지고 1층 화단으로 내려갔네 하며 중계를 해줬다. 아빠가 일처리(?)를 다 하고 나면 근처도 못 간 주제에 잘 묻어줬는지, 어느 위치쯤에 놓고 왔는지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져낸 아빠가 손을 잘 씻는지 안 씻는지 몰래 확인했다.
예민한 청각 때문에, 집에서 오빠가 방문 닫는 소리 등 뭔가를 세 개 놓거나 해도 그대로 가서 한바탕 퍼부었다. 그래서 싸움은 시작된다. 밤에 잠이 들어도 뭔가 누군가 물 마시러 나온다거나 늦게 잠드는 사람이 무슨 소리를 조금만 내도 발작을 하고 일어났다. 잠이 덜 깬 아침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내겐 소리가 아니라 소음이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귀속이 아팠다. 가족 각각의 발걸음 소리를 전부 알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리지 않고 일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나에게는 귀에도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귀가 쿵쿵거린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망쳐진 기분이 하루를 맑게 시작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그럼 식구들까지 피해를 보기 십상이었다. 식탁에서 쩝쩝 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밥을 먹어야 할 때면 스트레스도 함께 섭취했다. 또 누군가 휘파람 같은 것을 불 때 음정이 조금만 틀어져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민한 시각 때문에, 나 이외에 움직이는 것들을 무서워하고 벌레와 같이 작고 반복되는 꿈틀거리는 자잘한 것들을 보면 빽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 반응했고 거품을 물듯 자지러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돋아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팔을 쓸어내리며 진정을 시키느라 바쁘다.
집 안에서도 누군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귀신을 본 듯 놀라 가슴을 부여잡고 고꾸라진다.
머리의 가르마가 원하던 비율로 조금만 맞춰지지 않아도 짜증이 났고 잔머리가 붕 뜨면 거슬렸다. 무언가 내가 생각한 것의 모습이 아니라 삐져나오거나 흐트러지면 용납이 안됐고 사소한 용모가 원하는 모양이 아니라서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잠적하기도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그런 게 보기 싫어서인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직접 다 망가트려 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나의 모습, 생활, 방은 혼돈이었다.
가족 간에 그들이 싫어하는, 화를 돋우는 일은 모두 내가 도맡아 했다. 나의 예민함이 피해를 주고 있었다.
예민의 종합세트가 발휘되는 곳은 수학여행이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친구들하고 먹고 자는 것이 싫었다. 친구들은 그 맛에 수학여행을 기다려 왔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당시에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면 곧 따돌림을 자처하는 지름길이었다. 안 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지만 가서 몸과 마음이 편할 거라는 생각도 안 했다.
밤이 되면 일찍 잠든 친구들의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나마 모두가 잠들었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왠지 마음이 조금 놓인다. 처음 보는 이불 위에서 네모나게 반듯이 누워서 천장을 보고 손도 하나 까딱 안 하고 스르르 잠든다. 다음날 눈을 떠보면 뒤척이지도 않고 얼굴을 돌려내지도 않고 누웠던 그 모습 그대로 마치 화석이 된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단체 여행을 오면 항상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마지막에 잠드는 사람이 나였다.
"너네 다 크고 나서야 배우고 똑똑한 다른 엄마들 보니까 2월생들은 다 뒤늦게 신고해서 학교 늦게 보냈더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해야만 되는 줄 알고 너를 일찍 학교 보내고 아이고 진짜 뭔 짓인가 몰라. 오빠도 12월 말경에 태어났으니까 다음 해로 신고를 할걸 애먼 나이만 한 살 더 먹었다니까. 나중에 보니까 오빠 친구들 12월생은 다 늦게 했더라고 아이고 바보가 꾀부릴 줄도 모르고... 어휴"
나는 2월에 태어난 저주받은 빠른 년생이다. 그래서 7살에 학교를 들어가 8살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사실 이것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박자 느린 사람이고 예민한 사람인데 학교까지 일찍 들어갔으니 더 큰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맞지 않았다.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환경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다른 친구들은 잘하던 '놀 때는 놀고 수업에 집중 하기'가 힘이 들었다. 노는 것도, 수업을 듣는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믿어 줄 어른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초등학생 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던
주위가 산만하고 이해력이 부족하여......
이 글을 남긴 선생님의 얼굴은 기억에서 지워버렸지만 그 뻣뻣한 학생 기록카드에 적혀있던 길쭉길쭉하고 올곧던 선생님의 글씨체는 도통 잊히지가 않는다. 수업 시작 직전에 받아서 바로 열지 않고 쉬는 시간을 기다렸다. 원래는 부모님께 가져다 주라고 받은 것인데, 뭐라고 적혀 있을지 궁금해 한껏 기대하며 종이를 열었던 벅참이 곧 실망과, 서러움, 절망으로 바뀌어 버렸고 주변에 시끄럽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내 눈앞에 주어진 것을 믿기 힘들다는 듯이 바라봤다는 것은 아직도 머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저 글자를 보면 마음이 여전히 반응한다.
그 망할 '부족한 이해력' 때문에 적응력 학습이 늦게 된 건가 싶었다. 아무리 사실이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은 선의의 거짓말 따위는 할 수 없는 건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반감이 생겼고 공격적으로 대했다. 성적이 좋으면 예뻐하고 관심 주고, 성적이 좋지 않으면 교실에 하나의 장식으로 존재하는 꼭두각시 인형. 자책도 해봤다. '네가 못해서 문제지.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면, 집에서도 인정받고 인생에 한 번쯤은 감사할만한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있었겠지...'
나는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안중에도 없는 그냥 '학생 1'이었다. 아니 '학생 1'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도 못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티나 안 나면 좋겠지만 분위기나 흐리고 말짓이나 하고 다니는 '문제학생 1'이었다. 그렇다고 용기도 없어서 과감한 날라리가 되지도 못했다. 비겁하게 뒤에서 티가 날듯 말듯 소심하게 말썽이나 피우고 물의를 일으켰다.
그 이후로 나는 선생님의 말대로 정말로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뭘 해도 부족하고 모자란.
사실 그 문장을 본 이후로 자꾸 더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옳아서 정말로 서글퍼졌다.
누군가가 말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사실임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만큼 인간이 비참해질 때가 있을까.
'그 말이 맞네.'
무언가를 하다가도 조금만 잘 안되면 그 글씨가 먼저 떠올랐다.
'그 말이 진짜 맞네.'
대학생이 되어 성당에서 친해진 가영 언니네 집에 초대를 받았다.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했는데, 언니의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집을 비웠다고 하니 다른 언니들이 환호성을 하며 “놀자!” 하며 굉장히 좋아했다. 난 그때 이게 그렇게 신날 일인가 하며 의아했지만 기뻐 들뜬 그들을 보자니 나도 신이 나는 것처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와 진짜 좋다! 가자 " 했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거실로 갔는데 그곳에 다른 언니들이 텔레비전을 켜놓고 소파 주변에 벌러덩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왔어? 어서 와 앉아"하는 것이었다.
처음 알았다. 남의 집에 누워있을 수도 있는 거구나. 그리고 그 일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구나. 예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청결의 문제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상상도 못 할 아주 힘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력이었다. 아무튼 언니들을 보자 그때는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 일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것과 같은 거창한 사건이 되었다.
예민하다 보니 삶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와 평범한 대화를 하고 나서 대화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표정, 손짓, 목소리 톤을 읽어내느라, 그 안에서 의미를 자꾸 부여하게 되니 내용을 잊는다. 굳이 다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데 자꾸 그런 것부터 눈에 보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가 했던 표정 목소리 손짓에 신경을 쓰다 보니 보통의 대화가 나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을 때면 진지한 대화를 하다가도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하면 장난을 쳐버리거나 농담을 던지고 배시시 웃어버렸다.
지금까지 살며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지인이나 친구가 된 사람뿐만 아니라 단지 일상 속에서 잠시 스쳐가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각각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늘 관찰했다. 놀라기도 했고 멋져 보이기도 했다. 비교하니 내가 이상하게 보였고,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왜 불필요한 힘을 들이나 했다.
현재는 예전에 비하면 새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발전을 했다. 이제야 조금 ‘사람답게 산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다른 이들은 진작에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건데 얼마나 편안했을까. 밖에 나가고 학교에 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단순한 일을 하는 것도 나에게는 큰일이었고 에너지가 과소비되는 일이었으니까.
상처에는 상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환경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여행’은 예민한 나에게 처방전과 같았다. 여행을 피곤해하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행도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력이 필요한 일인데 의외로 감당해야 할 환경적인 요소보다 그래도, 호기심이 그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기뻤다.
여행을 '일시적인 도망'이라고 생각해왔다. 도망치는 희열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물론 하루 종일 처음 가보는 곳을 싸돌아 다니고 숙소로 왔을 때 그 지랄병은 다시 나타난다. 그렇지만 숙소를 같이 쓰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아무렇지 않게, 집에서 처럼 편안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피곤하다 보니 잠도 평소보다 더 잘 잔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예민함을 접어둬야만 가능하다'였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것을 만져보고, 먹어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일상과 다른 소리를 들어보고 하는 일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꽤나 자극적이지만 여행의 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마르셀 푸르스트
(Marcel Proust, 1871-1922)
여행에서, 일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하는 것을 자꾸 보게 되고 그것을 따라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점점 나도 정상의 범위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즉 직접 부딪쳐보는 충격요법이 통한 것이다. 남들 보기에 까탈스러운 사람, 예의 없는 사람이 되기 싫었고 여행까지 와서 용기 없는 사람이긴 싫었다. 거북한 냄새가 나도 반응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퍼붓지 않는 절제를 배웠다. 만지기 싫은 것도 때로는 만져보는 과감함을 배웠으며 어디선가 나는 듣기 싫은 소리도 반복되지 않는다면 인내했다. 보기 싫은 것도 실눈을 뜨고라도 봤다.
유난스러운 게 싫어서. 그것을 들키기 싫어서.
나도 보통의 사람이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면서 드디어 진정으로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음이 좋았다. 덕분에 자신에게 집중해 볼 수 있던 것은 더 좋았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은 삶의 의미이자 의지였다. 드디어 그런 일을 찾고 그 안에 흠뻑 빠져보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됐다. 좋아하는 일에 집중을 하니 예민함이 조금씩 유해졌다. 돌이켜보니 집중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주변 환경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쩌다가 나는 왜 이런 비정상적인 괴물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려고 어린 시절로 항해했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가? 하고 되돌아가 보면 딱히 그럴만한 일은 없는 것 같다. 한 가지에서 집착성을 보이면서 예민하다면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이 되었을 테지만, 한두 개도 아닌 오감이 다 민감해질 만한 트라우마는 일일이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오감이 민감했기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는 확실히 많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구나.'
맹자의 성선설이냐 순자의 성악설이냐 고자의 성무 성악설 이냐 와 같은 건 뭐가 옳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거 다 떠나서 기질의 타고 남은 확실히 있다고 믿게 되었다. 스스로가 증인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나의 비정상적인 면모가 조금은 설명이 되고 하나의 이유가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나의 존재를, 본질을 부정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좋은 면도 분명 있으니 다독여주자고 했다.
예민한 미각 덕분에, 요리의 간을 보면 뭐가 부족한지 잘도 알아맞힌다. 엄마는 나를 맛보게 한 후 내가 뭐뭐를 더 넣으라고 알려주면 나를 흘끗 흘겨보고 "여시 코빼기!" 했다.
조금 애매하게 오래된 것 같은 음식이 있으면 불러서 냄새를 맡아보라고 한다. “상했네”하면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끝내는 직접 먹어보고서 “가시네 촉새네” 했다.
*엄마어 사전;
-촉새: 여시 코빼기같이 뭔가를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
-여시 코빼기: 촉새같이 뭔가를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
(그렇다고 한다.)
예민한 후각 덕분에, 뭔가 타는 냄새와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냄새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어서 안전 문제에 대비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신경 쓰고 조심을 하는 편이다. 향수도 과하면 남에게 피해이기 때문에 적당히.
예민한 촉각 덕분에,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세세하게 잘 해낸다.
예민한 청각 덕분에, 작은 소리에도 반응을 할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면 각각의 악기가 따로따로 전부 잘 들려서 풍부하게 감상이 가능하다.
예민한 시각 덕분에, 누군가 고민을 하며 이게 어울릴까 저게 어울릴까 하고 물어보면 대충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균형과 비율에 맞게 잡아 내서 나의 생각을 꼼꼼하게 알려주는 세심함이 있다. 물론 나 자신은 잘 모르겠다.
종합적 예민함 덕분에, 결론적으로 눈치가 아주 빠르다.
사람을 만나면 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금세 알아차린다. 면접을 보러 가면 나의 예민함이 빛을 바라곤 했다. 면접 후에 문을 나설 면 내가 뽑힐지 안 뽑힐지 90% 감이 온다. 그리고 그쪽에서 원하는 경력을 가지고 있거나 업무적 방향만 맞는다면, 90% 는 나를 원한다.
왜냐면 그만큼 나는 상대에 조심하고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주며 반응해주고 상대가 바라는 대답을 잘 해낸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이다.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차별성은 예민한 반응들이 키워준 행동가지였다.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긴 하지만 사람들은 별것 아닌 작은 배려를 아주 좋아한다.
일상생활에서 누군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상황 판단이 아주 빠르다. 그래서 센스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와 같은 노래 가사는 내 노래 같다.
예민함은 피로감을 주지만 타인에 대한 세심한 통찰이 가능하게 도와준다. 자신에게 병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잘 다스린다면 좋은 면도 참 많은 하나의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잔디에도 퍽퍽 잘 앉는 씩씩한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곳에 가도 낯설어 하기 이전에 그 안에서 나름대로 편한 공간을 찾아낸다. 곤충을 만지는 것은 못하지만 일단 보는 것은 잘 견뎌낸다. 좋은 냄새는 좋다고 칭찬을 잘 쏟아내고 좋지 않아도 굳이 인상 쓰지 않고 진정한다. 말하자면, 상황을 유하게 보게 되었고 긍정적인 면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어디 가면 구석을 싫어하는 것은 여전하다. 강박이다. 강의실에서 구석에 앉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침대에 누워도, 이불을 깔아도 늘 보는 사람이 불편해 보일 정도로 제일 끝 가장자리에 몸을 누인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 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자냐고 떨어질까 무섭다고 한다. 나는 올바르게 눕기를 학을 떼고 거부한다. 그래도 달라진 점은 혹시나 해서 구석 쪽으로 발 끝을 살짝 빼본다. 느낌은 역시나 싫다.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
나는 엄마 말대로 아슬아슬하게 자고, 또 아슬아슬하게 살았다.
아슬아슬했지만 안 떨어지고 지금까지 살아냈다. 장하다.
오감이 활짝 열려있는 아슬아슬한 삶.
그 삶 속에서 누구보다 더 많이 느끼고, 배우고 노력하면서 계속해서 변화의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야지.
고백을 하니 한결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