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드로잉
얼마 전에는 윤정언니랑 연락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뜬금포 고백을 했다.
"언니가 알려준 왼손 드로잉 덕분에 나는 사람 됐지."
언니는, "뿌듯하다고 해야 하나?"라고 했다.
답장을 보냈다.
"응. 뿌듯해야지. 언니가 사람 하나 살리고, 사람으로 만들었어."
"너, 엄청 산만하고, 철딱서니 없고, 가벼운 애"
언니는 나의 첫인상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와 친해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성당에서 언니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아주 잘 지내는 사람이었고, 어딜 가나 인기가 많았다. 자신이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아도 그들이 찾아와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주변도 좋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가 공부도 많이 한 멋있어 보이는, 아주 어른 같은 진짜 어른이었다.
나와 10살이나 차이가 나기도 해서 언니가 항상 커 보였다. 그런 사람이 나와 가까워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언니 사이에는 허물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그 벽을 마침내 허물게 된 계기는 왼손 드로잉이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하는 드로잉. 왼손잡이에게는 오른손 드로잉이 맞겠다.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던 가영언니와 윤정언니가 친해서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몇 번 지속된 만남을 갖던 중에 언니가 왼손 드로잉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나의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왼손 드로잉은 아주 단순하다. 잘 쓰지 않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나가고 좋아하는 글, 일기, 느낌 등을 간단하게 적어보는 것이었다. 지우개는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아이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내 안의 순수함을 되찾는 것 같았다.
가지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은 알록달록한 색연필을 직접 사용해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
심리적인 방황을 많이 하던 나에게 왼손 드로잉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상처를 어루만지는 행위였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게 된 매우 신선한 놀이였다.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늘 산만했던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가르쳐 준 사람보다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하게 되었다.
한때 우리는 드로잉을 위해 자주 만났고, 그를 통해 이야기를 나눠보면서 우리가 상당히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조금씩 천천히 알아가며 언니도 나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윤정언니를 보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아이다움'을 지니고 있는 어른의 껍질을 두른 친구 같다. 어쩔 때는 나보다 더 유치하지만 정말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감싸주기도 하고 푼수 떼기 같이 오두방정을 떨기도 하지만 진심 어린 말들을 늘어트리며 감동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언니와 있으면 마음의 안정감을 느꼈다. 억지 부리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관계.
우린 만나기만 하면 일단 작은 스케치북을 펼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 손바닥 크기의 파란 스케치북을 선물하곤 했다.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동네에 있어서, 내 옆에 있어서 정말 좋았다.
드로잉이 끝나면 서로가 그리고 쓴 것을 읽어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해나갔다.
언니는 나에게 "너만의 느낌이 있어", "틀려도 괜찮아", "잘하고 있어"와 같은 말을 해주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말들을 들어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의 겨울산이 녹아내렸다.
'똑같이 그려내지 못하면 못 그리는 거고 , 틀리면 혼나야 하는 일이고, 순위에 들어야 잘하는 거라고 들어왔는데...'
윤정언니는 말했다.
"우리 모두는 예술가야. 삶이 예술이고 그 삶을 자기 다운 색깔로 살아가는 우리는 예술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예술가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자라면서 그것을 지켜내기도,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고.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장면을 아주 커다란 종이에 그림으로 그리는 꿈.
나는 아이들이 뛰놀듯이 신나고 과감하게 망설임 없이 그리고 있었다.
행복했다. 벅차올라 꿈의 화면이 흐려지고 있었다.
행복이 마음에 일자 늘 그래 왔듯이 예견된 불안이 덮쳤고, 나는 잠에서 깼다.
순간 그 그림을 정말로 그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꿈속에서 처럼 '망설임 없이' 그려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음, 그럼 왼손으로 라면 가능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제일 커다란 종이를 꺼내 오랜만에 왼손을 맡겨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엔 예술인과 일반인 이렇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타고나야 하고,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예술인인 줄 알았다.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반인이며 예술인의 카테고리 안에 범접하면 안 되는 꿈꿀 수도 없는 세상인 줄 알았다. 지나치게 동경해 왔기에 난 그들과 같이 길만 걸어도 특별하고 남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극복하는 과정에서 예술을 만났고 그의 강렬한 힘을 통해 용기가 생기면서 내가 선을 그었던 두 가지 분류의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자신만의 느낌대로, 꾸준히 하는 일반인이 곧 예술인이고, 윤정언니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음을 마음에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