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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작몽상가 Nov 23. 2020

왜 태어났니?

주워온 딸이 확실하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엄마, 나 주워왔다고 했지?"

"응 맞아.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그럴 줄 알았어."

"주워오기는 했지."

"뭣하러 주워왔대. 그냥 거기 두지."

"뭣하러는 뭔 뭣하러여 이놈아. 엄마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가시네야"

 


'구박덩어리'

즉, 구박을 많이 받는 사람, 구박받을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하는 것이 없어 자주 혼이 된통 나고, 예민하고 고약한 성격 때문에 문젯거리였다. 가정 불화는 주로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오빠는 오빠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못마땅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안 공식 명칭인'구박덩어리'라는 말로 불려졌고, 그를 수긍하며 살았다. 엄마가 지어낸 별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집안의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면서 모든 이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게 화가 나고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리저리 치이는 게 엄마의 입장에는 안쓰럽고 불쌍하기도 해서 동정의 의미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말을 쏟아낼때 마다 엄마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한숨을 크게 내쉬며 울먹이는 표정으로 괜한 물건을 뒤적이며 정리했다.



구박덩어리는 탄생 조차도 보통의 경우가 아니었다고 한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뻔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체중이 평균보다 미달됐던 작은 아이였다.


"그때 네가 하도 작게 태어난 데다 대고 애가 나왔는디 숨도 안 쉬고 울지를 않는거여. 의사 선생님이 거꾸로 번쩍 들어서 엉덩이를 막 때리고 그랬당게. 거기 간호사 중에 엄마 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울면서 살려만 달라고 온 병원이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잉.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응애응애 울었지 "


"그때 끝까지 울지 말지 그랬대."


엄마에게 갖은 모진 말을 다 쏟아냈다.

그럼 때로는 욕을 한 바가지 하기도, 어쩔 때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나를 뚫어져라 흘겨보는 걸로 대신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으면 나의 탄생에 '제발 살아달라고' 기도를 해주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어 그 말을 들으려고 한 번씩 그때의 상황을 묻고, 또 묻는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혹시 그때 그냥 울지 말았으면 모두에게 평화가 있었겠지.



부모님은 원래 무던한 사람들인지, 일부러 그런 척하는 것인지, 예민하고 마음이 여린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신 건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심하게 돌봐주지 못하셨다.

학업 성취만 잘해주길 바라셨다.


이제는 잘 알지만 그분들은 여유와 시간이 없으셨다. 우리가 어릴 때는 맞벌이를 하셨고, 두 분 다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며 힘든 세대를 거치 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에 항상 중점을 두셨다. 물론 그런 악착같이 살아오신 부모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고 우리가 편안한 집에서 추위, 더위, 먹을 걱정 없이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들어보니 사람들이 금수저네 흙수저네 하던데. 나는 흙수저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수저가 아예 없었지. 무수저라고 들어봤나 허허" 아빠는 자신을 '무수저'라 칭했다.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자주 도시락 없이 학교에 다니고 배가 고파서 수돗물을 마시거나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을 피해 밖으로 나가서 근처 가지밭, 오이밭으로 뛰어들어 농작물을 몰래 따먹고 들어왔단다. 끼니 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집이었다. 아빠의 회사의 동료들 중 나이가 비슷한 분들에게 '우리 세대는 다들 그랬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듣는 듯한 얼굴로 "그 정도였대요?"라고 할 만큼 아빠에게 주어진 가난은 아주 지독했다.


장남이라는 부담감 속에 공부를 하는 길만이 가난을 벗어나는 단 한 가지 방법이라고 믿었고, 다른 동생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형편이 안돼서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할머니가 첫째인 자신만 공부를 시켜준 것에 대해 아직까지 동생들에게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계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는데 그 덕분에 아빠의 식구들은 몇 년 후 드디어'방'이 아닌 '집'이라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고, 그 일은 신분상승과 같아서 여러 사람을 전보다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제일 우선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공부'였다.


8남매의 막내딸인 엄마는 일단 식구가 많은 집에 태어났는 데다가 동네에 친척들이 다 모여사는 형태여서 오고 가는 사람이 정말 많아 군것질거리도 있었고 먹는게 모자라는 정도는 아니었단다.

"나는 먹는 것은 있었다 그래도. "하며 아빠를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음 지으면서도 사실 지금이니까 그 일로 농담도 할 수 있는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어릴 적 수양딸과 같은 처지로 친척의 집에 보내질 정도로 집에서 돌봐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여러 또래 친척들과 지내면서 비교적 나은 환경에서 크면서 만족스러웠지만 얼마 가지 못해 집으로 왔다.

"아이고 그래도 엄마라고, 그 늙어 빠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암것도 없는 집구석으로 다시 돌아온 거 있지. 그때는 어렸응게 엄마가 필요했나벼."


엄마의 학창시절에 일명 '후레아 치마'를 교복으로 입는 중학교였다. 그런데 그 치마는 비싸서 살 수가 없어 동네에 고등학교 다니는 언니가 입던 '일자 치마'를 겨우 얻어 입고 학교를 다녔는데 이런 것들이 참으로 부끄러워서 자주 울었고 엄마도 어린 마음에 단지 예쁜 '후레아 치마'가 입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엄마네 식구는 여러 가지 농사를 지어 생활비를 충당했는데, 당시에 집에서 누에를 키워서 내다 파는 일을 했다. 커다랗고 길쭉한 방에서 반은 누에고치, 반은 식구들이 잠을 잤고 아침에 일어나면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애벌레들과 뒤섞인 상태로 일어나서 징그럽고 싫었던 기억이 많다고 했다. 문제는 그 누에를 팔아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누에의 성장 속도나 알을 가져오는 시기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학비가 밀리기 다반사였고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고 항상 기가 죽어 다녔고 그런 아등바등하고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에서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의 세대 차이가 얼마나 큰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 때는 집안이 어려우면 학교에서 지원을 해주어 교복이 없어서 못 입는 지경은 아니었고, 급식비가 없어서 밥을 못 먹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일화를 들으면 무슨 전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일들은 급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에서 몇십 년 새에 실제로 일어났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대략적으로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부모님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고 늘 말씀하셨고 학업을 최우선으로 손꼽다 보니 그를 잘 이행하지 못했을 때 좋은 말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오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이행하지 못했다.

학생이 '해야 할 일'을 잘하지 못하니 나는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감정을 돌봄 받는 것이었다.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한 사람이었던 나는, 키우기에 여간 힘든 사람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표현을 잘하지 않으셨다.

마치 '사랑은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학습이 되어있는 사람들처럼.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고, 티라도 나면 자식들이 응석받이가 되어 공부도 안 하고 어린양 만 부릴 거라고 생각하신 걸까.

아빠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장남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면서 표현을 하는 것에 서툰 사람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드러내면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게 맞는 것 같다.

그리고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온 엄마는 집안의 대장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난을 겪으면 충격으로 사람이 어떤 일에도 감정이 무뎌지는 걸까.

대물림 되는 가난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결국 우리에게 되돌려 주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사랑을 주고받을 시간에, 걱정이 앞서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런 일 말고도 중요하게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서 그랬던 걸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그들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엄마는 한 번씩 이런 말을 하셨다.

"배가 불렀지 너네가"


완전히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것은 또 갖고 있었다. 다만 남들이 휴가로 바다에 놀러 갈 때 우리는 등산을 가고, 계곡을 놀러 가면 민박 같은 숙소를 이용해 본적이 없지만, 우리 식구가 빽빽하게 끼여져서 잠들 수 있는 텐트가 있었다. 외식이라면 짜장면을 먹는 것. 먹고 싶은 신라면은 몇백 원 더 비싸다는 이유로 집에는 삼양라면만 있었다. 없는 것 없이 다 있긴 있었지만 주로 저렴한 것 위주로 있었고, 놀러 가긴 가는데 돈이 많이 드는 곳은 가지 않았다. 외식도 하긴 하는데 장소가 뻔하게 정해져 있는 정도였다.

사실은 그것마저도 불만이었다.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서 그냥 삶이 그런 것이다 하고 자랐으면 모를까, 어설프게 여러 가지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를 갖지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였다. 그리고 일명 자수성가를 한 아빠는 나름의 부유 속에서도 온전히 마음 편하게 즐기지 못하면서 쫓기듯 살아오셨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자식이 3명이나 되는 사람으로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그렇게 사신 것 같다. 나는 그런 아빠를 한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함이 사무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야만 했다는 게, 아빠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게 마음 아팠다.


머리가 조금 더 커지고 나서 보니 그렇게라도, 어중간하게라도 부족하지 않게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을 갖는 것이 감사해야 할 일이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가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풍족하면, 자식들이 딛고 일어서기가 훨씬 수월했다. 부모의 부는 자식이 밟고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지름길이 되는 세상이었다.

물질적 빈곤이 정신적 빈곤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사촌 주희는 나보다 4일 빨리 태어난 동갑 친구이다. 유하고 장난기가 많은 성격의 고모부는 딸인 주희를 항상 놀리고 괴롭히며 허허허 웃으셨다. 할머니 집에 모이면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심심하면 주희를 발가락으로 건드리고 "돼지 주희", "주희니까 주둥이", "주뎅이" 이런 말들을 하면서 쿡쿡 찌르며 안아 버리거나 팔다리를 잡고 만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럼 주희는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정색을 하며 온몸으로 짜증을 부리며 고모부를 밀어냈다. 알았다며 그만한다고 하고 주희가 조금 잠잠해지면 또다시 건드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모습이 항상 많이도 부러웠다.

나를 유쾌하게 놀려주는 유치한 아빠가, 괴롭힘도 좋으니 귀찮은 관심을 주고 안아주는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모부는 전화기 너머로 주희를 '쭈!'라는 어이없는 애칭으로 다정하게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그랬다.

"부모랑 자식도 합이 들어야 한디야."

나는 아빠와 합이 들지 못했다.


성격, 사는 방식, 말투 등과 같은 사소한 모든 것이 추구하는 갈래 전부 서로가 원하는 반대였다.

게다가 나는 아빠가 원하는 '그것'을 해주지 않았다.

엄마와는 안 맞는 와중에도 부딪히고 티격태격하면서 고운 정 미운 정이 제대로 들어서 지냈지만,

아빠와는 달랐다.


"하도 아빠랑 안 맞아서 가시네야 멀리멀리 가버려라 했더니만... 말이 씨가 돼서 진짜로 멀리 가버렸당게......미쳐"

엄마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려 짤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왜 태어났지?'

'왜 나를 낳은 거지?'

'내가 없는 게 모두에게 나았겠다'


내가 부모가 되었는데 자식이 내게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 기분을 모르기 때문에 주워오지 말지 그랬냐고, 태어났을 때 울지 않게 놔두지 그랬냐고 말한 것이겠지.

나를 더 미워하거나, 나를 더 불쌍해하거나 둘 중에 한 가지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 그런 말을 하면 부모가 분명 충격을 받을 것이며, 결국에는 내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해 일종의 고문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게 당시에는 속이 잠시 풀리기도 했지만, 훗날 내게 더 큰 상처로 되돌아와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보다 불행한 삶이 있을까.

사실 그것이 부정 인지도 몰랐다. 그냥 내가 모두에게 피해를 줄 뿐이라고 생각하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고, 쓸모없는 인간이 왜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인지 했다.

스무 살의 후반이 되어서야 그것이야 말로 '존재의 부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때는 이유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그 시간 속에서 괴로움만 커지고 있었다.


나는 진짜 바보인가, 왜 항상 늦게야 알아갈까. 조금 일찍 알았으면, 내가 그런 것을 느끼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도움의 손길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심각한 일임을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썼을지도 모르는데.


세상에는 살아봐야 배워가는 것들이 있다.

당시에는 아무도 말을 해 주지 않는, 혹은 시기적으로 긴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

그때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부분 부분 보였던 것들이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지며 조금씩 납득이 가는 그런 것들. 한층 성숙해지면서 머리가 자라서 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에는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이 약이 되어주기도 하는 그런 일들.

굳이 살아봐야 알게 되고 느끼는 것.


그런 것들을 늦게나마 알게 되려고, 이해하려고 아직 살아있나 보다.

돌이켜보니 내가 해온 못된 말들이 실은 살고 싶어서 했던 말들처럼 처절하게 느껴졌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 누구보다 강했던, 그 누구보다 약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아이고 구박덩어리가 복덩어리 됐당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잘해주지 그랬대?"

"긍게 말이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하면서 웃음을 훔쳐낸다.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빠와는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각각의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울타리 밖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게 얼마나 복잡한 일인가.

타인의 다름은 때론 쉽게 인정하지만, 가족 간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거름망을 여러 번 걸쳤지만 자잘 자잘했던 잔해는 끝내 걸러지지 못하고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쌓이고 쌓여 바닥에 가라앉은 작은 조각들을 계속해서 몸에 지닌 채로 살아가야만 하나보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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