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rk Mar 28. 2018

복숭아 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루카 구아다니노-콜 미 바이 유어 네임

1983년 이탈리아로 스물넷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가 펄먼 교수의 보조 연구원으로 찾아온다. 펄먼의 아들 열일곱의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여름은 지루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올리버가 찾아오자 지루했던 일상은 소중한 나날들로 바뀐다. 


뉴욕 타임스는 “티모시 샬라메만으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볼 가치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더해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을 수상했으니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차고 넘친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티모시 샬라메는 22세의 어린 나이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연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다. (수상은 <다키스트 아워>의 게리 올드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그의 연기가 폭발하는 장면은 역시나 마지막 장면이다. 올리버가 미국으로 떠난 후 추운 겨울날 전화기가 살며시 울린다. 한때, 전화선 너머의 여자 친구 목소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엘리오는 단박에 올리버의 목소리를 알아차린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엘리오에게 올리버는 자신이 약혼을 했고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오는 가만히 전화기를 내려놓고 모닥불 앞 앉아 자신의 마음처럼 요란하게 요동치는 불꽃을 바라본다. 
   
이때, 엘리오의 감정의 파노라마가 약 4분간 이어진다. 그의 감정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읽을 수 있을까? 
   
분노, 과거의 추억, 배신감, 허탈함, 옛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 자신에 대한 환멸, 엘리오에 대한 그리움 등 오만가지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각각의 크기와 속도로 일정치 않게 움직인다. 이런 무질서한 감정을 엔딩 신에서 4분간 티모시 샬라메는 보여준다. 


마지막에 엄마가 밥먹으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어렸을 적 우리는 유럽과 미국을 같은 외국으로 생각했었다. 영어를 쓰는 금발의 백인 덩치들이 즐비하고 집 같은 경우도 심슨의 집처럼 나무로 만든 2층 저택에 잔디밭이 넓게 깔려 있고 옆에는 차고가 하나 있는. 하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유럽 문화를 접하면서 유럽과 미국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가는 재미를 우리는 알고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유럽의 모습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탈리아 시골의 모습 자세히 보여준다. 미국의 가정집에 있는 직선의 계단이 아닌 나선 계단, 벽에 난 조그마한 문, 자유분방한 가구 배치, 목가적인 분위기와 여유로운 생활은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아기자기한 유럽의 문화이다. 



자신이 게이임을 깨닫고 “우리 아버지가 알았으면 나를 시설에 넣었을걸”이라고 말하는 올리버와 자신의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엘리오의 부모님도 각 문화를 대표하는 것만 같다. 특히 엘리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말과 위로는 참으로 '유럽'적이다.  


이 슬픔을 잊지마. 기쁨도 그 안에 있으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노골적으로 그들을 사랑을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섬세하게 그려낸다.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애정의 신호를 보내지만 둘의 주파수는 좀처럼 맞지 않는다. 괴로운 기다림이 끝나고 둘이 서로를 원함을 확인했을 때 대중들이 의아해한 것도 이해가 간다. 이 두 남자의 사랑은 보통의 로맨스처럼 정도(正道)를 밟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의 감정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오해하는 것이 정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시나브로 둘의 몸짓과 표정과 감정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침묵을 참을 수 없다’ 같은 쪽지를 남기는 것. 올리버의 다비드 별을 목에 건 채 호수에 나오는 행위, 영화 초반에 둘 사이에 흐르는 섬세한 시선들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고상한 멜로 영화로 만들어준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우린 정말 많은 날들을 낭비했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게이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 시간이 더욱 짧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황홀하면서 가슴 아프다. 



두 남자가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call me by your name, but also I call you by mine” 이 이야기를 들은 엘리오는 올리버를 ‘엘리오’라고, 올리버는 엘리오를 ‘올리버’라고 부른다. 
  


사랑의 비극은 아니 어쩌면 관계의 비극은 ‘내 맘이 네 맘 같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것만큼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도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관계의 비극은 싹튼다. 
   
하지만 적어도 올리버와 엘리오에겐 그런 비극은 없다. 올리버가 엘리오가 되고 엘리오가 올리버가 되는 것은 둘의 마음이 완전히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측정할 순 없지만 둘은 똑같이 서로를 갈망하고 하나 되길 원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이 그렇게 슬펐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은 지옥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