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그래비티
故 스티브 잡스는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애플은 단순한 기술 개발 기업이 아니다.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을 융합하려고 항상 노력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경영 방침 때문인지
애플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충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이런 충성심의 원천인 ‘애플 감성’은
이러한 스티브 잡스의 철학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현재 CG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감상이라기보단 체험에 가까운 이 영화를 보면
마치 관객을 우주에 갖다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우주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우주선의 굉음으로 시작한다.
약 30초간의 설명이 끝난 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압도적인 영상을 무심한 듯 툭 던진다.
교신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전까지인 약 10여 초 동안,
관객을 오프닝의 설명처럼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없는 공간을 체험하게 해준다.
13분 넘게 지속되는 감독의 롱 테이크 장면은
2차원의 스크린을 3차원으로 느끼게 착각해주는
거리감과 깊이감을 선사한다.
이를 위해 카메라, 인물, 대상이 모두 둥글게 움직인다.
이 과정을 관람하면서 관객은 가상 이미지 공간처럼
무중력 상태의 우주 공간을 체험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더불어 우주 공간 느낌을 더욱 사실적으로 주기 위해
실제적인 음향 효과 사용은 절제하고
극 중의 주인공들이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한다.
웅웅대는 소리, 진동, 자신의 숨소리 등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러한 노력들 덕분에 <그래비티>를 관람한 관객들은
라뮈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이란 영화를 본
당시 관람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50초의 짧은 작품이다.
아무런 스토리 없이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19세기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열차가 들어올 때,
진짜로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고 한다.
영화를 본 관람객이라면 누구도 <그래비티>가
현대 컴퓨터 그래픽 수준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과학적인 성과는 OK. 그렇다면 인문학적으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을까?
우선 영화 제목에 집중하자.
<그래비티> 중력이란 뜻이다.
그런데 영화의 주 무대인 우주는 중력이 없는 곳이다.
??? <러브 스토리>에 사랑이 없고
<타이타닉>에 타이타닉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요상한 제목 선정이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일찍 자식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임무 수행을 위해 우주로 왔다.
그녀는 맷 코왈스키에게 우주가 적막해서 좋다고 말한다.
지구에서 그녀는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라이언 박사는 서로 당기는 힘인 중력을 잃은 채 살아왔다.
하지만 맷 코왈스키의 희생, 삶에 대한 의지를 통해 다시 세계로 진입하려고 한다.
그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것이다.
맷 코왈스키가 마지막으로 라이언에게 해준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능청스러운 그는 죽음을 앞두면서도 라이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갠지스 강 위의 태양을 봐. 환상적이야.”
왜 하필 갠지스일까?
중부 히말라야산맥에서 발원하여 힌두스탄 평야로
흘러들어가는 갠지스강은 힌두교의 성지이다.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에 목욕하면
모든 죄를 소멸할 수 있으며 죽은 뒤 이 강물에 뼛가루를 흘려보내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덕분에 실제 갠지스강은 엄청나게 더럽지만)
인도의 다른 모든 강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유독 갠지스강만 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갠지스강만이 극락으로 흐른다고 믿는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은 특별하다.
마치 갠지스강만이 북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만약 천국이 존재한다면 맷 코왈스키는
갠지스 강줄기를 따라 그곳으로 갔으리라는 은유가 아니었을까?
맷 코왈스키의 희생으로 중력을 잃은 채 살아간 스톤 박사가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누군가와 소통하고
삶의 의미를 회복해가는 과정은 눈물겹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구 어딘가로 불시착한 라이언 스톤 박사는
흙을 움켜쥐고 스스로 일어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라이언 스톤 박사가 일어서자 카메라는 아래에서 박사를 올려다본다.
마치 소인족이 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단상 위에 올라가 연설하는 선지자를 보는 것처럼.
이로 인해 그녀의 발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거대한 도약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느낌이 나도록 연출했다.
마침내 그녀는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 타인과의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로 귀환한다.
그곳에서 흙은 움켜쥐고 땅을 디디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은
타인과 단절했던 삶은 청산하고 무수한 중력이 존재하는 사회로 진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영화 제목을 ‘중력’이라고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감독은 맷 코왈스키의 입을 빌려 관객들에게 말한다.
이해해, 여기 얼마나 좋아. 그냥 전원도 꺼버리고, 불도 다 꺼버리고, 그냥 눈을 감고 세상 모두를 잊어버리면 되니까. 당신을 상처 입힐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안전하다고. 계속 가야만 하는 이유가 뭔데? 계속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뭐 있냐고? 당신 애가 죽었어, 그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여전히 모든 건 당신이 지금 뭘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어. 만약 계속해서 살기로 결정했다면 그냥 가보는 거야. 자리에 앉아서 즐겨, 이 땅에 당신 두 발을 묻고 삶을 살아가는 거야. 이봐, 라이언.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야.
"I get it, it's nice up here. You could just shut down all the systems, turn down all the lights, just close your eyes and tune out everyone. There's nobody up here that can hurt you. It's safe. What's the point of going on? What's the point of living? Your kid died, it doesn't get any rougher than that. It's still a matter of what you do now. If you decide to go then you just gotta get on with it. Sit back, enjoy the ride, you gotta plant both your feet on the ground and start living life. Hey, Ryan, it's time to go home."
타인 나에게 중력이듯 나 역시 타인에게 중력이다.
좋든 나쁘든, 원하든 원치 않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