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 입양 초기, 가장 어려운 게 산책이었다. (지금이라고 쉽겠냐만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게 나의 성향이었다. 나는 계획했던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중요한 사람이다. 성과 중심으로 살아와서 그렇다. 갈수록 더 큰 성취를 원했지만 대체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성과의 기준을 일에서 인생의 디테일로 옮기자는 다짐을 했지만, 잘 될 턱이 없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 조금은 삶의 구체성을 알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 그럴 리가.
하루 두 번의 산책을 약속하고, 루틴을 정비했다. 8시에 일어나 밥을 주고 산초가 밥을 먹는 동안 나는 30분 요가를 한다. 산책은 1시간 내외로 망원유수지를 찍고 오는 코스로 한다.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고 내 밥을 챙겨 먹는다. 11시 즈음부터는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을 보내다 5시경 오후 산책을 시작한다. 역시 코스는 망원유수지 왕복. 6시에 산초 밥을 챙기고 나도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12시 전에 잠든다. 디테일한 계획까지는 아니어도 대략 이런 수준이면 되겠지, 싶었다.
원대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5분 컷으로 식사를 마치는 분은 옆에 깔린 요가 매트 위로 올라와 누우셨다. 귤엔터 대표님들과 함께 산책할 때는 망원유수지 왕복 산책이 1시간 컷으로 가능했으나, 단 둘이 나왔더니 산초가 잘 걷질 않았다. 수시로 마킹을 하고, 새를 바라보느라 꿈쩍도 안 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생명 앞에서 시간 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나는 속이 탔다. 멈춘 애를 움직여보겠다고 간식을 들고 사정을 하거나 강하게 줄을 잡고 있는 나를 누가 보고 있을까 봐 눈치를 봤다. (실제로 밤 산책 중 멈춰 선 산초와 전전긍긍하는 나를 보고 웃는 무리를 만난 적이 있고, 멘탈이 나갈 만큼 나간 나는 그게 다 비웃음으로 들렸다.)
계획대로 움직이길 원하는 데다 남들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은 나는 이 시기에 멘탈이 탈탈 털렸다. 온통 긴장 상태라 산책을 다녀오면 휴식에만 2배의 시간을 썼다. 당연히 이후 일정은 자주 어그러졌다. 체력이 달리니 자꾸 자극적인 음식이 당겨 식습관도 엉망이 됐다. 산책 후 발을 닦이는 일까지도 버겁게 느껴졌다. 습관이 되지 않은 산책은 온통 노동이었다. 통제보다는 긍정적 교육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칭찬에 인색하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한 사람이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실패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동시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한데 죄 없는 강아지에게 화를 낸다는 사실에 수없이 자책했다. 괴로움에 술도 많이 먹은 듯. (아, 이건 아닌가.)
그때 도움이 된 건 역시 선배들의 경험담이었다. 산초를 임보 했던 밤이네 식구들 역시 초보 보호자였으니 그분들 앞에서는 각종 어려움을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에게는 산책을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이게 이런 거냐’라며 질문과 하소연을 쏟아냈다. 친구는 망원동으로 출동해 대신 산책을 해주고 동네에 자극이 너무 많고 산초의 에너지가 대단해 힘든 게 당연하다는 진단을 내려줬다. 강아지는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이니 보호자의 여유가 중요하다는 귤엔터의 팁도 있었다.
MBTI로 사람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예측불가의 생명과 살며 ISTJ적 모먼트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새로 만난 보호자와 강아지에게는 다가가지 않는다. 경험하지 못한 일에는 두려움이 많고, 이해가 가지 않으면 움직이질 못한다. 러프하게라도 일정한 경계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경험에 입각해 움직이는 사람이라 산초와의 시간이 더해지며 ‘노동’으로 생각되는 지분이 꽤 많이 줄었다. 걷다가 눈을 마주 보며 웃는 기쁨 같은 것을 발견한다. 예전엔 코스와 거리, 시간에 집착했는데 그 지점은 유연해졌다. 산책을 ‘걷다’라고 생각해서 여전히 쉬지 않고 파워워킹 중이다. 그래도 이제는 목표지점까지 가지 않더라도 힘들면 쉬어가기도 시작했다. 덕분에 여유를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