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지붕 B사감 May 17. 2024

내가 폭력을 휘두르던 날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갑자기 YS의 왕방울 같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미 6시를 넘겨버린 시간을 확인하자 화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좀 제대로 외우라고, 빨리하고 집에 좀 가자.
알았어, 미안해......     


1980년대 지방의 중학교에서 있던 일이다. 지금처럼 학생인권조례 나부랭이 같은 걸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험을 보고 나서 성적이 나오면 교실 뒤편에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반 전원의 성적을 게시하고 더 나아가 교무실 가까운 곳 벽면에는 한 학년 전교생의 서열이 공개되었다. 성적 게시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여전했다. 우연에 우연이 몇백 번 겹쳐서 입학성적이 반에서 일 등이었던 탓에 학기 초부터 많이 주목받았고 성적표가 벽을 장식하는 날이면 아이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더 많이 느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3년 내내 창피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정점에서 차차 완만하게 하강하다가 옆으로 직선을 그려나갔다. 이런 잔인한 성적 지상주의 광풍이 지금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여전하겠지만, 당시로서는 게시하는 선생이나 그걸 감당하는 학생이나 모두가 놀라울 정도로 의연했다.

  

50여 명이 넘는 학생으로 빽빽하던 교실은 4분단으로 나뉘었고 한 분단은 두 명씩 앉는다. 짝꿍은 어떻게 정해질까. 매달 교실 게시판에 붙은 시험성적을 바탕으로 맨 위와 맨 아래 등수를 연결한다. 이 둘이 옆 짝이 되는 이유는 성적이 좋지 않거나 아직 공부법을 잘 알지 못하는 친구를 성적이 좋은 친구가 도와서 반 전체의 평균 점수를 상승시키자는 취지였다. 모든 학생은 공부를 좋아해야만 하며 학교에 오는 이유가 오로지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것으로 누군가에 의해 설정되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짝꿍 YS와 맨 앞줄에 앉았다.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눈이 엄청나게 크고 이목구비가 모두 바르게 예쁜 부러운 얼굴이었는데 목소리는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뭘 해도 자신 없어 보였다. 사실 얌전하고 목소리가 작아서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기로는 삐사감도 마찬가지였다. 짝꿍은 소란스럽지 않고 그 나이 특유의 활달한 기운도 없이 조용하게 옆자리에 머물렀다. 맨 앞자리가 부담이었지만 서로가 얌전한 편이라 마음이 편하고 다른 불만은 없었다. 이 아이가 우리 반 꼴찌라는 것은 평소에는 잘 인식할 수 없었다. 학기 초였고 그냥 공부가 재미없는 아이일 수 있겠다고, 선생님 의도대로 조금 도움을 줘서 성적이 오른다면 그것도 괜찮겠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중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접하는 과목으로는 단연 영어를 꼽을 수 있다. 지금은 유치원 때부터 이중 언어를 배우는 시대이지만, 어린이 티를 벗고 몸도 마음도 성숙해지는 시기에 배우기 시작하는 과목이 다른 나라의 언어인 것은, 뭔가 진짜 어른스러운 행보같이 느껴졌다. 그래봤자 지금 유치원 수준에도 못 미치는 아이엠어보이, 유아어걸이었지만......

     

지금도 공교육 현장에서의 영어교육이 실질적인 언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당시 영어교육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외우기, 닥치고 외우기였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서 검사받고 귀가, 이것이 매일의 미션이었다. 그런데 미션 방식이 괴이했다. 짝꿍과 함께 암기해서 같이 통과해야 귀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공부하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가르치면서 본인도 확실하게 학습 내용을 인지하게 된다는 대단히 위대한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이 기가 막힌 방식은 1년 내내 지속되었다.


구구단을 외울 때처럼 이상한 리듬을 타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암기한다. 교실, 복도, 나무 벤치에 자리를 잡고 손을 마주 잡고 박자를 맞춰가며 필사적으로 외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국기 하강식을 하기 전에는 집에 가고 싶다. 나름 청소년기라고 그 시간이 되면 배도 고파오고 영어 수업 시간에 이미 다 외운 곳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도 진력난다. 다른 조 애들은 하나둘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하는데, 짝꿍은 꾸물거리며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YS는 좀처럼 외우지 못했다.

     

YS는 영어랑 너무 친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알파벳은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운데, 거기에 길지는 않지만, 문장을 줄줄 외워야 하니 버거웠을 것이다. 당시는 파닉스를 하면서 음가를 정확히 확인하는 과정도 없었고 그런 건 나중에 아이와 집에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배운 터라 삐사감도 당최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저 친구 머릿속에 마법처럼 교과서 문장이 휘리릭 들어가 흡수되길 간절히 기원했다. 수십 번 외운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가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 다시 외워 봐’가 처음에는 그런대로 친절하고 따듯한 목소리로 나왔는데 회를 거듭하면서 목소리는 높아지고 짜증과 한숨이 진하게 섞였다. 친구는 점점 헛갈려서 더 많이 틀리고 위축되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깔면서 목소리마저 고압적으로 바뀐 친구 앞에서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우왕, 시원스럽게 소리 내서 우는 것도 아니고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이다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찌 눈물마저 그렇게 자신 없고 맥없이 흘러내리던지. 차라리 뭐라고 호통을 쳤으면 시원했을 것을.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서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한참을 있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외우기 시작했다. 후진적인 영어교육 방식과 성적 위주의 교육 정책이 만나 엄청난 역 시너지효과를 내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물론 무척 당황했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선생과 짝꿍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어쨌든 중학 시절 내내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반 배정 시험을 생각보다(실력보다) 잘 봐서 1등으로 입학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담임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상황이었는데 1위를 지키지 못해 다른 아이로 바뀔 때까지 짝꿍은 내 속을 뒤집었다. 여전히 앞뒤 자리 언저리에서 마주쳤지만, YS와 별다른 대화를 한 기억은 없다. 오로지 그날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조차 없었던 그의 눈물만이 기억에 남았다. 오랫동안 맘속에 봉인되어 있던 그의 기억이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짝꿍도 이와 같은 아이가 아니었을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무지하고 광폭했던 학교 현장에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가 찰 정도로 말을 잘하고 어른 뺨치게 영악한 아이들 속에서 감정도 주장도 죽이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이. 이제 교육 현장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명확해졌다. 성적표를 벽에 전시하고 그것만으로 우열을 가리고 상처를 주고받는 당사자로 어린 학생들을 몰아넣었던 야만은 더 이상 없어지길. 글을 쓰면서 새삼 마음이 아파져 온다.      


하지만 여기에서 알아주었으면 하는 점이 있다. 시대에 따라 지적 장애의 정의가 바뀐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1Q 70~84에 해당하는 아이들, 즉 현재 기준에 따라 경계선 지능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전과 다름없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지적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고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1Q 분포도로 산정해보면 전체 학생 인구의 약 14퍼센트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현재 평균적으로 한 학급당 35명이라면 이 중 약 5명 정도가 해당 된다는 뜻이다. 오래전 기준에 따른다면 한 학급당 하위 5명 정도는 지적 장애에 해당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한 학급당 하위 5명 정도의 아이들이 주위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에 놓은 채로 다양한 구조신호(SOS)를 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_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놀라운 실상 >


 


매거진의 이전글 식물이 전하는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