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획의 일을 지켜낼 수 있는가

샘 서울 분산 이후, 기획자의 소임에 관해

by 깡셉


*일러두기 : 브랜딩 컨설턴시 샘서울은 2024년 초부터 한남동 오피스 체제를 정리하고, 본사(서울숲), 성수 유닛, 합정 유닛 등 3개 사무실로 분산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들어가며, 분산이라는 화두


발제의 맥락

사실 지난번에는 여건이 맞지 않아 넥스트체인지 관련 자료를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 업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의 전망이라는 큰 틀의 화두에서부터, 지금 당장 현장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구체적이고 세밀한 이야기까지 함께 나누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풀어가면 담론이 흩어지고 추상적으로만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분산’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 보는 편이 더 의미 있겠다고 판단했고, 이번 직톡의 마지막 세션은 그렇게 모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발제 방식의 의도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진지하게, 각자가 한동안 몰두하며 이 주제를 곱씹어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화면에 띄우는 장표 대신, 마치 대학교 발제문처럼 종이에 출력해 각자 손에 쥘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글자와 단어, 문장 하나하나를 직접 따라 읽으며 주제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길 바랐고, 그 과정에서 보다 깊고 밀도 있는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제목의 배경

타이틀은 ‘분산 이후, 기획’입니다. 이 제목은 작년 초 저희가 유닛을 나누고 팀을 분리한 뒤, 브랜드 기획이라는 일이 극적으로 달라졌다거나 뚜렷한 변화를 체감했기 때문에 붙인 것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하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기획이라는 업무는 대개 정교한 협업 체계나 유기적인 제도·시스템 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선임 기획자의 개인적인 역량에 크게 의존합니다. 그렇기에 분산되고 공간을 달리하며 팀이 갈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기획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분산에 던질 첫 질문들

사실 지금 시점에서는 아주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질문들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분산은 내가 하는 일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혹은 *“(대표님이 의도하셨던 대로) 분산 이후 자율과 책임이 커진 상황에서, 나름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도 일의 감도와 관점의 깊이가 스스로 성숙해 가고 있는가?”*와 같은 물음들입니다.



본격적으로, 분산의 이유와 업의 위기


그런데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에 앞서, 아니 어쩌면 그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더 근원적인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왜 “우리”가 분산을 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분산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회사는 왜 굳이 분산이라는 방식을 선택해야 했던 걸까요?


실용적 이유

그 이유는 단순히 조직이 커지면서 피할 수 없이 생겨나는 사일로나 단절 때문만은 아닙니다. 큰 집단 안에 숨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브랜드 컨설팅이라는 일이 본질적으로 클라이언트와의 1:1 대화에 기반해, 그들의 요구에 꼭 맞는 해법을 제시하는 업이라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결국 작은 단위로 조직을 나누는 것은, 각자가 일당백의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근원적 이유 ― 두려움

앞서 말한 것들은 현상적이고 실용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훨씬 더 근원적인 감정, 곧 “이대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브랜드 에이전시로서 우리는 과연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결을 띱니다. 정확히 말해 10년 전은 물론, 불과 5년 전과도 질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신생 에이전시나 부상하는 젊은 스튜디오들이 우리의 몫을 빼앗지는 않을까 하는, 시장 안에서의 파이 경쟁이나 자리 다툼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과연 앞으로도 고객과 사회에 의해 필요로 될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 존재의 이유 자체에 관한 물음입니다.


AI 인베이전의 충격

이는 잘 아시다시피 오늘날 모든 크리에이티브 분야가 직면하고 있는, 이른바 인공지능 인베이전이 불러온 위기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전에는 기준이 되는 콘텐츠만 있으면 우리만이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브랜드 스토리, BIS, 콘셉트 워딩, 슬로건 등이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브랜딩 전략이나 브랜드 관점조차 GPT에게 묻고 곧바로 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에이전시 안에서 Strategy·Concept·Verbal이라는 일련의 아웃풋을 생산하던 브랜드 기획자의 역할이 과연 여전히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됩니다.


실제로 합정 유닛에서는 이미 디자이너들이 AI를 활용해 우리가 해오던 기획의 핵심들—워딩, BX 전략, 스토리 등을—훌륭히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결과물은 ‘매우 그럴듯하게, 때때로 우리보다 더 잘’.


시장 구조의 한계

그런데 사실 AI 인베이전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시장 자체가 지닌 태생적·내재적 한계 역시 우리의 위기를 촉발시키는 근원적 요인입니다. 이와 관련해 시장 전체 파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지표(아래)가 있습니다. 브랜드 에이전시, 그중에서도 BI와 CI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며 소위 BX 브랜딩이라 불리는, 나름 브랜딩 컨설팅의 외관을 갖춘 메이저 에이전시들의 전체 시장 규모와 순위입니다.


2025_직톡_기획직군 프로그램 발표 자료 발췌.001.jpeg
2025_직톡_기획직군 프로그램 발표 자료 발췌.002.jpeg
*7억~1,000억 원 시장은 국내 기준 ‘중견급 틈새시장’으로, 특정 분야에 집중된 B2B·B2C 서비스가 대부분


어떠신가요? 이 시장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단순히 각 에이전시들이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일까요? 혹은 그 안의 사람들이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회가 이 업에 지불할 수 있는 가치의 한계에 있습니다. 사회는 우리가 하는 일을 분명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고 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브랜드 에이전시들이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잘 아시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보여드린 장표만 보더라도, 우리는 디자인 이상의 것, 단순한 로고를 넘어서는 가치와 방법론을 이야기하며 얼마나 많은 개념과 실천을 현장에 흘려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BX라는 개념 자체와 그 업의 의미가 과거보다 훨씬 더 보편화·대중화되었음에도, 이 일에 대한 사회적 지불은 여전히 야박하기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의 등장은 물론 BX 관점의 대중화로 인해 ‘브랜드에 유능한 담당자’들이 기업 내부에 속속 등장하면서, 오히려 우리 에이전시의 존재 지평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작은 모듈 단위로만 존재하거나, 간헐적으로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프리랜서들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그 두려움과 위기감이 최근 몇 년간 더욱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분산의 진정한 배경

분산은 분명, 커다란 조직의 덩어리에서 벗어나 각자의 자율과 책임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니어든 주니어든 각자가 나름의 역할을 지니고 일당백의 기획자이자 컨설턴트로 고군분투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마련된 환경적 장치였습니다. 동시에 이는 나이가 들어가는 리더들에게 경영진 의존도를 줄이고, 자연스러운 스핀오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추진된, 매우 샘 내부적인 의지와 배경을 지닌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브랜드 에이전시라는 존재의 위태로움, 나아가 브랜드 기획자라는 직업이 과연 이전처럼 지속될 수 있을지—정확히 말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선명한 두려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기획 이후의 기획


전환된 질문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어오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분산 이후, 기획’이 아니라 ‘기획 이후, 기획’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기획자라는 직업이 등장한 이후 지금 이 시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전망될 기획의 모습에 대해 우리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문자답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기획이라는 일이 여전히 가치 있고 고유하며 존귀할 수 있음을 어떻게 실천하고 증명할 것인가—그 존재 증명의 과제가야말로 더 깊고 본질적으로 다뤄져야 할 주제입니다.


기획자로서의 태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아니, 기획자로서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각자의 일에 대한 태도, 업에 대한 관점, 직업적 가치관에 따라 여러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업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굳이 에이전시가 아니더라도 인하우스나 다른 산업군으로 커리어를 확장하면 되지”, “나는 내 삶의 균형이 더 중요하다. 일은 일이고, 나는 나다—업에 지나치게 자아를 의탁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들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자기 콘텐츠에 대한 욕망이 점차 분명해져서인지—에이전시의 미래나 브랜딩 컨설팅의 넥스트라는 질문에 처절하게 매달려야 한다는 숙명론에는 빠져 있지 않기에, 충분히 그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제 본업을 브랜드 기획에 두고 있습니다. 다른 콘텐츠나 활동을 전개하더라도, 본업이라는 뿌리가 있어야 그것들이 단단히 지탱될 수 있습니다. 물론 금전적 이유도 있겠지요. 지난 10년 동안 이 일을 이어왔기에, 이 직업이 단순히 사라지지 않고 그 의미와 사회적 가치, 존중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굳이 사회학의 ‘인정투쟁’ 개념을 꺼내지 않더라도, 저의 사회적 정체성은 기획자라는 정체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것을 스스로 가꾸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브랜드 기획의 미래, 그 변화와 전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단순한 생리적·경제적 생존을 넘어, 저의 사회적 정체성과 자기 확장을 위한 실존적 생존을 위해—스스로 묻고자 합니다. 앞으로의 브랜드 기획, 기획자의 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상상과 이상, 이론과 사고실험, 그리고 프로젝트 속에서의 일상적 실천을 통해 주어진 범위 안에서 부딪혀 나가려 합니다.



나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전망

오늘 앞선 세션에서 다룬 프로젝트 케이스 분석과 리더분들의 인사이트 공유 역시, 결국 기획자로서의 투쟁이자 ‘다름’과 ‘인정’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의 일부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 노력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위기와 부정적인 이야기만 강조한 듯해, 마지막은 긍정적 전망 하나로 맺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브랜드 기획의 일—특히 에이전시 차원에서의 기획 업무 가운데—샘의 기획자들이 산출하는 장표의 수준, 개념의 운용, 전략적 밀도를 따라올 만한 에이전시는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디자인은 또 다른 문제겠지요(웃음).


이것이 단순한 자화자찬만은 아닙니다. 제가 이따금 다른 에이전시의 기획서를 볼 기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른바 ‘1티어’라고 불리는 인하우스 브랜드의 장표조차 우리와 비교하면 놀랄 만큼 로우합니다. 성의 여부를 떠나 내용의 깊이와 논리, 감도의 수준이 충분히 담기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답습이나 1세대 기획의 흔적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평가는 내부의 자기만족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파트너인 D사는 샘의 기획과 장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기도 하며, D사뿐 아니라 다른 클라이언트들 역시 비슷하게 평가합니다.


마무리하며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획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새롭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아웃풋—기획의 감도, 내러티브의 심도, 전략의 밀도—를 꾸준히 높여 나가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한다면 저는 믿습니다. 5년, 10년 뒤에도 지금 여기 모인 우리가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물론 그때도 대체로 불행하고, 대체로 힘들고, 때로는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금처럼 소소한 행복을 맛보고, 즐거움을 나누고, 때로는 자랑스러운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기획자로서의 일상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획자, 우리 존재 화이팅!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