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황제 탈출기 #1.
J는 2020년 10월~12월까지 원단위로 기록한 나의 가계부를 보고 "황제 같은 생활을 하고 있네."라고 진단했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 10월, 11월에는 제주 3박 4일 여행의 여파가 있었고, 12월에는 연말연시라 다소 약속이 많았으며, 3개월 동안 한 번에 5만 원 이상 결제 금액이 거의 없는 걸 봤을 때 큰 소비를 한 것도 아니고 자잘하게 다 써야만 하는 곳에 썼다는 것. 그리고 온갖 구독제는 콘텐츠 산업의 종사자로서 감을 잃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까지. 하지만 왜 그렇게 자주 신세계 백화점 식품매장에 가는지, 자차를 굴리기 위해 주유도 하고 하이패스 요금도 내면서 왜 매달 교통카드 요금과 택시비도 지출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홈플러스에서 식재료를 사는데 8만 원을 쓴 주에 저녁 외식으로도 왜 8만 원을 더 써야 했는지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의 소비에는 휴식이 없어서 3개월 동안 하루에 0원도 안 쓴 날이 고작 5일 정도였다. 나처럼 무언가를 꾸준하게 못하는 사람이 유일하게 꾸준히 하고 있는 게 매일매일 카드를 긁는 것이었다.
가계부에 기록된 나의 소비 습관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나는 비싼 원두를 사놓고도 더 비싼 커피를 사 먹고 회사 동료들의 커피까지도 선뜻 계산하는 사람. 이북을 사놓고도 종이책을 또 사는 사람. 친구나 가족 선물로 한 달에 10만 원 이상은 늘 소비하는 사람.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겠다며 4가지 종류의 비누(샴푸바, 린스 바, 바디 비누, 핸드 비누)를 사는 사람, 나무로 된 비누 받침대까지 4개를 사는 사람. 욕조 있는 집으로 이사 와서는 러쉬 입욕제를 사야만 하는 사람. 한 달에 한번 꼴로 타지에서 게스트가 찾아와 2박 이상을 머물다가는 사람, 12월 한 달만 따져 보자면 지인들과 먹고 마시는데 카드를 36번 긁은 사람이었다. 한 번에 큰돈을 쓰지는 않지만 소확행 중독자처럼 매일매일 작은 돈을 계속 쓰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람을 자주 만나?" "내가?" "매일매일 약속이 있잖아." "아 그게... 매일매일은 아닐 거야."
J의 질문이 아니었으면 의식하지도 못했을 텐데, 가계부 속에 나는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도(방역 정서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계속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타지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우리 집에서 2박 3일을 머물다 갔고, 동생과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했고, 또 한 달에 한 번꼴로 전주에 있는 본가에 가서 엄마랑 놀았다. 평상시에는 회사 동료들과 주 2-3회 소소하게 만났다. 나라는 사람이 워낙 사교적이고 친구가 많다기보다는 소수의 편한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약속은 일주일에 몇 번 정도가 적당한 거야?" "한번!" "아, 그렇구나."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도 소비가 줄지 않았던 결정적이 이유. 홈파티는 홈파티대로, 외식은 외식대로 했고, 한 달에 한번 게스트들을 대접했으며 본가에 가서도 빼놓지 않고 소비를 했다. 그렇다고 부산에 살게 되며 새롭게 시작한 인간관계가 폭넓어졌던 것도 아니며, 게스트 중 한 명과는 싸워서 지금 두 달째 연락도 안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약속을 만들어도 J처럼 나보다 훨씬 폭넓은 인간 관계 유지와 관계의 선 지키기가 가능한 것이었다.
앞으로 약속은 일주일에 되도록 한 번이다. 그 외에는 혼자만의 시간 동안 그간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고 싶다. 몰두해서 책을 읽거나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
J는 재무설계사가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으로 22년차 내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