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황제 탈출기 #4.
넷플릭스가 없었을 땐 주말에 주로 뭐했더라? 영화를 봤지. 집 근처 영화관에 가고 IPTV에서 보고. 그리고 산책을 했지. 지금도 여전히 주말엔 영화관에 가고 IPTV를 보고 산책을 하고 그리고 넷플릭스를 본다. 왓챠도 본다. 웨이브도 본다. 광고 없는 유튜브도 본다.
가계부를 쓰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매달 얼마를 구독제 서비스에 퍼붓고 있는지.
Before : 넷플릭스 12,000원 + 왓챠 7,900원 + 웨이브 12,000원 + 유튜브 8,690원 = 40,590원
알고 나서는 그런가 보다 했다. 한 달에 4만 원 정도를 내가 좋아하는 거에 쓰는 건데 아깝지 않지. 그 정도는 버니깐. 하지만 과연 돈을 낸 만큼 잘 이용하고 있는 걸까. 본전은 뽑고 있는 걸까. 구독제 소비자로서 나는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시리즈를 몰아서 하루에 다 본 적이 없을뿐더러 아무리 재미있어도 앉은자리에서 세 편 이상을 보기가 힘들다. 영화도 하루에 한편 정도 보는 쪽이다. 20대에는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세계의 명화 100선에서 리스트를 지워가며 하루에 3-4편씩 영화를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조급한 시절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보고 산책을 하고 간단한 요리와 함께 맥주를 곁들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매일매일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유튜브를 번갈아 가며 체크인 하지만 콘텐츠 개별로 따졌을 때 하루에 한편도 제대로 안보는 날이 훨씬 많았다. 나라고 이중에 한 개씩만 구독하려는 시도를 안 해봤을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넷플릭스 구독을 갱신하고 왓챠를 끊은 달에는 왓챠에 보고 싶었던 시리즈가 올라오고, 넷플릭스를 끊으면 찜해놨던 오리지널 콘텐츠가 올라온다. 그리고 유튜브로 말할 거 같으면 나는 유튜브를 거의 보지 않아서 유명하다는 유튜버를 거의 모른다. 가끔 가전제품 리뷰를 검색하고(이건 정말 필요할 때), 샤워할 때 JTBC 뉴스룸이나 MBC뉴스데스크를 틀어놓을 뿐이지만 유튜브 뮤직은 이용한다. 내가 제일 증오하는 건 유튜브 영화 리뷰이며, 유튜브에 난무하는 조악한 기획/편집 영상들이다. 물론 작년엔 가끔 방탄 TV는 봤다. 듣똑라도 보긴 봤다. 아참 박막례 할머니도 봤었지.
결론적으로는 다 필요하기는 하니 계정 공유 계원을 모집해보고 웨이브는 <시녀 이야기>를 다 봤으니 끊기로 한다. 구독제 계원 모집은 몰라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안 하고 있었다. 매달 4만 원 정도는 그렇게 써도 될 것 같았으니깐. 요새는 구독제 계원을 구하는 앱도 있다지만 모르는 사람과 그렇게 연결되기는 싫었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동생이랑 아이디를 공유하고 요금은 내가 내고 있었던 만큼 계속 책임지고 가져가고 싶었다. 일단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까 싶어 회사에서 제일 친한 동료 넷이 모여있는 단톡 방에 계원을 모집톡을 띄워 봤는데, 왓챠는 너무 허무하다 싶을 만큼 한큐에 성공해 버렸다. 넷플릭스는 회사 동료 S와 프리미엄 요금을 내고 2개씩 나눠 쓰기로 했다. S가 얼마나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꾸벅하던지.(아니 그나저나 우리 회사 친구들은 알고 보면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살고 있는 걸까. 이 부분은 나중에 허심탕하게 얘기를 나눠봐야 하겠다.) 그리고 유튜브가 남았는데 한차례 실패 끝에 따라 하면 100% 성공이라는 블로그 글을 더듬더듬 따라 하며 인도 계정을 뚫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이게 불법일까 아닐까, 나중에 불이익은 없을까 지금까지도 내적 갈등이 있지만 일단은 문제가 생길때까지 써보기로 한다. 물론 문제가 생겼을때 정직하게 책임질 각오는 했다.
After : 넷플릭스 7,250원 + 왓챠 3,225원 +유튜브 1,986원 = 12,461원
이렇게 매달 28,129원 씩을 아끼게 됐다는 이야기. 작년 12월부터 세계자연기금 WWF에 월 2만원씩 생애 첫 정기 기부를 시작했는데 올 한해 기부금은 이렇게 아낀 돈으로 충당하고도 남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벌어 내가 쓰는 돈이지만 처음으로 내가 번 돈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고 느낀다. 구독제 다이어트는 시작일 뿐이다.
작년 12월에 새로운 구독서비스를 결제했다. 그림구독이다. 한 달에 아트포스터가 1개씩 오는데 발송 전까지 뭐가 오는지 알수 없다는 설렘이 있고, 대부분 신진작가의 작업이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그림구독을 6개월 할부로 40% 할인받아 결제는데 J는 환불을 권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이야기. 너무도 우아하지 않나요? 그림 구독이라니요! 이건 딱 6개월만 하고 끊을게, J야 괜찮지?
그림구독 핀즐(https://pinzle.net/) 6개월 8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