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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Aug 21. 2022

비건페스타와 <유령의 마음으로>

 특별할 것 없던 오후, 유령은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유령은 내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꿈처럼 아름답고 깃털처럼 부드러운,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흐르는 물처럼 반짝이는 유령의 마음이었다.

―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작가 지음



    오늘 오전은 비건페스타에 다녀오는데 다 썼다. 기대를 많이 하면서도, 괜히 가나, 별로인가, 엄청 고민했다. 집에서 꽤 멀기도 하고, 가려면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하고 갔다가 오는 길에는 짐이 많을테니 어디 들릴 수 없이 곧장 집으로 와야 하는데, 집에 오고 나면 또 다시 나가는 게 어려워져서 하루의 일정 전체가 비건페스타 + 집으로 이루어질 것이 뻔했기에. 




    결론은, 새로운 경험은 늘 즐겁다는 것. 사과와 포도로 만든 와인도 오랜만에 마셨다. 또 뭘 먹었더라. 감자옹심이와 야채로만 낸 육수, 비건 치즈 스프레드, 라이스칩, 동결건조 딸기, 두유 요거트, 더덕차, 더덕밀크 등등. 신기하고 재밌는 구경거리들도 많았다. 지구와 내 몸을 생각하고 차선을 찾아내는 과정이 즐거웠다. 기대만큼 크진 않았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집에는 사또밥이랑 나뚜루 그린티+초코앤넛츠 아이스크림, 호리두유, 당근잼 등등을 가져왔다. 물론 모두 선물로 받은 것. 엄마아빠가 되게 신기해했고, 맛있게 먹어주었다. 안 갔으면 알지 못했을 세계라, 다녀오길 참 잘했다. 





    비건페스타를 오가는 먼 길에는 임선우 작가의 <유령의 마음으로>를 행복하게 읽었다. 지난번에 빌렸다가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한 후 예약을 걸어놨다가 다시 빌린 책이다. 귀여운 유령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표지는 내내 들고 다니며 조금씩 읽고 싶게 만든다. 책 자체도 가볍고 작게 나온데다, 솜사탕같은 단편소설집이라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책 속 인물들이 겪는 쓰라리고 어쩌면 극복 못할 아픔들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이런 삶도 있구나, 하고. 책의 뒷편에 실린 작가의 말과 작품 해설, 그리고 추천의 글도 모두 빠짐없이 좋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유령의 마음으로>에 실린 단편에는 판타지적 요소가 속속 들어가있다. 어느날 내게서 또 다른 나인 유령이 스르르 나왔다거나, 사람이 빛이 나는 해파리로 변하게 되고, 또 동면하는 남자를 도우며 천만원을 받는다. 마냥 뜬구름잡는 행복에 젖어 있지 않는 것도 좋았지만, 문장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작가님의 다른 소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사랑하게 되는 예술가가 생기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기니까. 기다림이 쓰기보단 달콤하다는 걸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야 배우고 있다.




    내가 좋아한 표현은 이런 게 있다. 빛이 나지 않는 해파리가 된 김지연 씨가 한 말, '저는 그날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았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만 있다면, 삶에 미련이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울한 망고들을 사 온 초저녁이었다. (생략) 평소에 나는 사과는 대책 없어 보이고 대추는 고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망고들은 어쩐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고,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잖이 울적해 보였다. 나는 첫눈에 망고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중 가장 점잖아 보이는 것으로 두 개를 골라 집으로 돌아가자 처음 보는 남자가 집 안에 있었다.'




    우울한 망고들이라니. 사실 이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이 책 전체를 읽게 되었다. 임선우 작가님의 책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섣불리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그저 그들 나름의 속도와 방식대로 계속 생을 이어가기를 책을 읽으며, 이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속으로 응원할 뿐이다. 너무나 말랑말랑한 그들의 마음이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갑옷을 하나도 입지 못한 것 같아서 조마조마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위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바스라지기 쉬운지, 그러면서도 나무뿌리처럼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지 요즘 깨닫고 있다. 내가 이 소설집을 다른 사람들, 특히 너무 지쳐서 소설도 못 읽겠다고 드러누워 천장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이유를 황예인 문학평론가께서 이미 '마음을 살려내는 이야기'라는 더 적절할 수 없는 제목의 해설집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산뜻하고 가뿐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나도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무표정한 마음을 살피고, 우연히 생성되는 관계에 기꺼이 뛰어들며, 무엇보다 내 삶에 책임을 다하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살아 볼 만하다고 다시 숨을 고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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