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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장수 Jun 08. 2020

열등감아. 고마워

우리를 늘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했던 불편한 감정

“우린 아직 미생이야!”


‘미생’은 바둑에서 아직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미완의 바둑알을 말한다. 드라마 ‘미생’ 속 등장하는 이 대사는 늘 불안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인생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2014년도에 방영된 이 드리마는 직장인들에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열광시켰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나였다.


바둑 기사가 되지 못한 장그래가 상사에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가 겪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여느 직장에서 있을 법한 인물들과 사건들, 디테일한 배경은 몰입감을 높였다. 많은 회사원들이 직장 경험이 없던 장그래의 모습에 입사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회사원들은 스스로를 장그래라고 여겼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꼰대 소리를 듣는 부장님 조차도 장그래는 바로 자신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나도 장그래로 빙의되어 있었다.


장그래의 모습이 짠했던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출근 날 어쩔 줄 몰라 어리바리했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직장이라는 곳은 합법적 권한이 부여되고, 직급으로 형성된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장그래는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회사를 나가야 하는 계약직 신분이었다. 장그래와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모두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었지만, 그만 혼자 덩그러니 2년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왔으니 그가 느끼는 열등감은 훨씬 컸을 것이다. 장그래는 그들과 동기라고는 하지만 같은 신분이 될 수 없었다. 가족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을 애매한 경계선에 놓인 주변인 정도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직원 앞에서는 스스로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지는 것을 겪게 된다. 떠올리기 싫지만 숨겨두었던, 우리 사회 안에 곪아있던 열등감과 너무 익숙했던 감정을 끄집어내는  장그래를 우리는 응원했고, 또 위로했다. 아니, 위로받았다.


한 무역회사에서 벌어지는 업무와 대사에서 등장하는 전문 용어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미생에서는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계약직 사원 장그래의 시선을 통해 하청업체 상대 갑질, 계약직, 사내정치, 직장 내 성희롱 등을 바라본다. 이 드라마의 원작인 만화 ‘미생’을 그린 윤태호 작가는 분명 오랜 직장생활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놀랍도록 디테일한 내용은 취재를 통해 공부하여 구성하였다고 하니, 정말 이 분은 타고난 천재가 아닐까. 그런데 어느 방송에 나와 인터뷰한 내용에선,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은 열등감 덩어리였고, 그 열등감으로 인한 분노가 젊은 그를 채찍질했다고 고백한 내용이 있다. 장그래는 바로 젊은 시절의 윤태호 작가를 투영한 인물이었고,‘미생’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열등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사실 열등감은 누구나 한 번쯤 겪은 적이 있는 감기처럼 익숙하다. 그렇지만 열등감을 이야기하는 것은 늘 불편하다. 바로 그것은 낮은 자존감을 스스로 밝히며 민낯을 드러내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열등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몸에 박힌 성가신 가시처럼 좀처럼 삭지 않고 나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히는 정체를 찾으려면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고 뽑아내야 한다.  



나의 어린 시절. 남들과 다른 환경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는 열등감이 뿌리 깊이 박혔다. 그리고 서서히 그 영역을 넓히며 온몸으로 뻗어나갔다. 나중에는 열등감이 분노로 바뀌면서 모든 것이 싫었다.  그러다가 분노조차 소진되면 현실은 원래 차가운 곳이라며 세상에 관한 정의를 스스로 내리게 된다.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내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자존감이 땅에 떨어졌다.


열등감에 가득 찬 사람의 분노조차 애잔하게 느껴졌다. 행여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이해가 되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84년작 ‘아마데우스’에서는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살리에리의 모습을 다룬다. (사족으로 영화에서 설정된 살리에리가 지닌 열등감이나 모차르트를 음해했다는 설정은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영화에서 모차르트의 라이벌이었던 살리에리도 비록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얻는 넘사벽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언제나 열등감을 느꼈고, 그것은 그의 평생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내가 오직 원했던 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벙어리로 만드셨소. 어째서?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말년의 살리에르가 신부에게 하는 고백하는 대사이다. 그는 비록 악한으로 나오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천재를 뛰어넘을 수 없는 범인(凡人)의 인간적인 고뇌가 잘 드러났다. 난 살리에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고,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땐 왜 그렇게 아팠는지… 당시 불순하고 성가시게 여긴 열등감은 나를 늘 아프게 했지만, 그때의 감정은 내 마음속 앨범에 차곡차곡 쌓인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에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열등감에 관한 이야기는 한결 편하다. 고백하자면, 열등감은 나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닫게 해 주었고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뛰어넘어 보려고 부단히 애썼다. 끝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열등감은 나를 움직이는 훌륭한 땔감이 되어주었다. 아픔과 깨달음, 다시 아픔 그리고 깨달음.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열등감은 조금씩 소멸하며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가 투명하고 영롱한 유리알로 바뀌듯.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 앤 골드문트'가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이 소설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수능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걸 본다고 교편으로 머리를 한 대 맞았던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 선생님이었다. ‘나르치스 앤 골드문트 (Narcissus and Goldmund)’는 국내에서 ‘지(知)와 사랑’으로 소개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들어온 풍부한 감성을 가진 골드문트는 이성적이고 완전무결한 것처럼 보이는 나르치스를 동경한다. 나르치스는 어린 나이임에도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 수도원에서 일하는 수습교사였다. 하지만 골트문트는 나르치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도원을 나가게 된다. 수도원 밖에서 골드문트는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결국에는 영주의 부인과 애정행각을 하다 걸려 교수형에 처할 운명이었다. 그때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가 골드문트를 구해주고, 수도원으로 데리고 오게 된다. 골드문트는 여태껏 나르치스는 자신이 감히 다가가지 못할 고결함과 지성을 가진 넘사벽인 인물이라고 여겼는데, 사실 나르치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성과 풍부한 감정을 가진 골드문트를 동경하며 아끼고 있었다는 것.


어쩌면 우리도 나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여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나는 늘 누군가를 부러워했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동경하며, 그들처럼 되길 원했다. 그것이 없는 내가 밉고 싫었다.  기대는 늘 실망으로 점철되었지만, 마치 쇠가 담금질을 거듭하며 단단해지는 것처럼 아픔과 깨달음을 반복하며 점점 나를 발견해갔다. 여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알고 보니 모순과 불완전함 덩어리였고, 늘 결핍되어 있다고 느낀 나에게도 남들에게 없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과 세상에 핀 수만 가지의 꽃처럼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진다는 것이다. 열등감은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견뎌내며 마침내 꽃을 피우기 위한 인고의 과정인 듯하다.  나를 그토록 아프게 했던 열등감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값진 경험이면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열등감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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