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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장수 Jun 08. 2020

아날로그 감성의 이유

세상의 모든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그리고 그것들에 속한 나

어린 시절 놀거리 중의 하나가 연탄 싸움이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장의 시기를 지나던 터라 가정에서의 난방 연료로 연탄에서 도시가스로 변하는 과정에 있었지만, 여전히 도심 변두리나 낙후된 동네에서는 연탄을 사용했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는 공장이 밀집해 있었고, 뒤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연탄을 때는 집이 많아서 아침이 되면 불쏘시개로 하얗게 변한 연탄을 집어 문 밖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나는 쌓아놓은 연탄을 발로 차 허물어뜨리고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연탄 몇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연탄 싸움을 제안했다. 나는 온몸이 연탄재로 뒤덮였고, 나를 집중적으로 맞춘 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쫒아갔지만, 그 아이는 철문을 열고 자기 집으로 도망쳤다. 보통 아이들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인기척이 없으면 호기심에 다시 나오기 마련이다. 문 옆에 숨어서 쥐 죽은 듯이 한참을 기다렸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이때다 싶어 연탄을 날렸는 데 그 애엄마였다. 내가 날린 연탄은 그 아이 엄마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헝클어뜨렸고,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연탄은 즐거운 놀거리였지만 모두가 잠든 밤에는 무서운 존재였다. 당시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세상과 이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태어난 지 2년 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갈뻔했다. 우리 집은 부뚜막에 연탄을 때워 여기서 데워진 물이 호스를 통해 방 시멘트 바닥을 순환하며 방바닥을 덥혔다. 가족들은 한 방에 누워 열을 맞춰 잠을 자고 있었고, 연탄가스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내가 두 살배기였던 당시 연탄의 심상치 않는 냄새를 맡고 새벽에 큰 울음으로 온 가족을 깨워 집단 죽음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탄은 나의 삶에 깊이 알게 모르게 엮여있었다. 겨울철의 추위를 막아주었고, 놀거리가 부족했던 동네에서 놀잇감이 되어주었고, 때론 온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며 삶의 고단함을 투영하기도 했으며,  반대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연탄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열등재에 속하는 연탄은 사람들이 점점 먹고살만해지면서 사용이 줄어들었다. 이젠 폐기물이 남지 않는 깨끗하고 편리한 도시가스를 사용한다.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지만 불과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상의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도시정비사업으로 허물어졌고, 그 위엔 아스팔트가 부어져 도로로 포장되었고, 일부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90년대에는 삐삐가 유행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신제품에 대한 수용이 더딘지라 내가 삐삐를 사서 한껏 뽐을 내고 허리에 차고 다녔더니 이미 유행이 지나버렸고, 친구들은 벽돌만 한 시티폰을 들고 똥폼을 잡았다. 부의 상징이었던 핸드폰은 2000년대에 오면서 싸게 보급이 되었고,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며 모든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빠르게 바뀌어 이젠 옛것은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는 시대가 되었다.  물건은 빠르게 진부해지고, 매일 접하는 정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쓸모없어졌다.


나는 그냥 정지된 화면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쿠퍼와 아멜라가 중력이 다른 밀러 행성 도착해 단 몇 시간을 보내고, 우주 공간에 머물러있던 인듀어런스호에 돌아갔더니 이미 23년이 지나있었던 것처럼. 혹시 나도 강력한 블랙홀 안에 갇혀 왜곡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홀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가는 것은 늘 아쉽다. 어린 시절 보았던 타다 버려진 연탄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내 기억의 일부가 되었지만, 이젠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동네 어귀의 버드나무가 평생 그 자리에서 영원히 푸르게 자라기를 바랐지만, 이젠 그 버드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빠르게 변화한다는 말은 빠르게 소멸해간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낯선 모습으로 바뀌어있을 것이며, 이 장소의 나도 다른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이런 헛헛함이 드는 건 나도 결국은 그 풍경 속의 일부이며 언젠가 소멸해가야 할 존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오히려 추억이 스며 있는 물건에 더 눈길이 가고 정겹다. 노트북 컴퓨터에 타자를 치는 것보다 탁탁탁 경쾌한 소리를 내는 타자기의 감촉이 더 좋게 느껴지고, 부드러운 볼펜보다는 잉크를 묻히고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사각거리며 쓰는 펜촉이 좋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메일을 쓰는 것보다 손편지를 쓰는 것이 좋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함께 소멸해가는 존재들끼리의 동병상련 같은 마음이랄까. 이런 물건들은 내 생각의 속도와 맞기도 하고, 소멸의 속도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우고 글을 쓰면, 비록 키보드의 속도는 쫓아가지 못하지만 엄지와 검지로 방향을 잡고 중지로 펜의 무게를 버텨내면  한 획 한 획에  생각과 감정이 묻어 나온다. 어쩌면 소멸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조금의 불편함을 감당하고, 그것을 몸으로 느끼며 새겨두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는지.  결국 아날로그 감성은 세상의 소멸해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나도 그것들에 속한다는 것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생겨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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