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감에 대하여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길이 있다면 죽음으로 향한 길이다.
누구에게도 비껴갈 수 없는 하나의 길.
저마다 그 여정은 다른 모양이겠지만 결국 그 문턱을 넘어서면 같은 길이다.
노년의 삶과 죽어감,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냉철한 시선이 담긴 영화 '아무르'를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노부부에게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전주.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지켜주고자 하는 힘에 부친 몸부림은 갇힌 몸의 저주처럼 풀기 힘든, 아니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어 깊은 어둠의 그늘에 묻힌다.
조르주의 선택에 모두가 동의할 순 없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 안개처럼 퍼져간 생각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해되기엔 숱한 논란의 폭풍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아니, 조르주는 그 어떤 이해도 구할 마음이 없었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안느의 동반자로서, 서로가 원하는 삶의 마무리를 그렇게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삶도, 어떤 죽음도 타인의 이해와 판단이 그리 중요할까. 안타까움이 남는다면 그건 바라보는 이의 다른 가치관 때문일 테니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보고 나서도 한참을 불편한 마음이 사그라들질 않아 마음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불편함인지, 과정의 선택이 문제였는지, 어차피 정해진 길을 향한 삶에 대한 태도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질문들이 초점 없는 상념과 함께 밀려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조르주역의 장 루이 트랭티냥은 2003년 역시 배우였던 딸 마리 트랭티냥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배우 활동을 접고 은둔하는 삶을 선택했다가 이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에 배인 고통과 우울과 슬픔과 무기력이 죽음과 닮아 있다 느낀 건.. 영화 전반에 흐르던 죽음의 허무와 회의주의적인 시선이 그의 얼굴과 몸짓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저 지긋이 응시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