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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싯다르타

고유한 나의 길

by winter flush

한 달에 한 번 고전소설 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 1년이 지나니 열두 권의 책이 쌓였다. 한 권 한 권 함께 읽으니 더 깊게 다가온다. 다양한 작가의 책을 읽고 있지만 헤세에 대한 애정은 <데미안>에 이어 <싯다르타>로 두 번째 만남을 이어갔다.

평생을 '배움'의 길에서 깨달음을 구한 고빈다와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며 깨달음을 얻는 싯다르타의 삶의 여정을 지켜보며 온전히 '나'를 믿으며 내 안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사유가 깊어진다. 말로 배울 수 있는 지식과 말로는 배울 수 없는 지혜.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깊이가 다른 사유의 차이는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달린 일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가르침 만을 간절히 원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낼 작은 힘도 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고빈다의 삶에서 본다.

인도의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사상을 추종하지도 글로 엮어 내지도 말라고 하였다. 종교나 누군가의 신념이나 철학 등도 따르지 말길 당부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믿고 따르라 하였다. 각자 자신의 의지로 삶을 헤쳐나갈 지혜를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가길 당부한 것이리라. 바라문(인도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사문의 길을 택하며 부처 고타마의 제자가 되는 것도 거부한 채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 싯다르타처럼 말이다. 소설 속, 싯다르타가 부처 고타마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처의 깨달음은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침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을 통해 얻어졌지, 그것이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싯다르타의 말의 울림은 강하게 다가왔다. 누군가 닦아놓은 반듯한 길을 따라 걷는 안전함 대신 새로 길을 내는 일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고, 어쩌면 되돌아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꺾이지 않는 고집으로 부모님 속을 꽤나 썩였던 헤세. 길들지 않는 야생마처럼 다듬어지지 않던 그의 감정과 일탈, 고집스러운 기세는 싯다르타의 세속에서의 삶처럼 방황의 시간을 거치게 하지만 결국 그 체험의 시간은 자신만의 길을 내고, 깨달음으로 향하기 위한 아픈 몸부림이었나 보다.

평생 道를 구하지만 그에 이르지 못하는 고빈다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때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다가온 시간이었다.

'고유한 나'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여 '배움'만을 갈구하는가?

부족한 경험을 글로 대신 읽으며 여전히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진 않고 있는지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 주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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